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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 |
결국 이번에도 전기요금이 정치에 굴복했다. 발전원가에 한참 못 미치는 가정용 전기요금은 손도 대지 못하고, 대기업용 전기요금만 올린 것이 증거다. 민생경제의 어려움도 고려했겠지만, 5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내년 총선거를 의식한 고육지책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전의 골병은 깊어만 간다. 이제 빚내서 돌려 막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한전채 발행금액이 한전법이 정한 한도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자본적립금의 5배까지로 설정된 한전채 발행한도가 영업적자 누적으로 자본적립금이 줄어들면서, 현재 104조6000억 원에서 내년에는 70조원 안팎으로 쪼그라들 것이 확실시 된다. 현재 발행액이 거의 80조원 정도이기 때문에 발행한도를 확대하지 않으면 한전은 바로 생사기로의 벼랑 끝에 내몰린다.
한전채 발행한도를 의식한 자금조달은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금리 조건에서 불리한 은행 대출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레고랜드 사태로 대규모 한전채 발행이 회사채 시장을 교란할 수 있다는 우려를 줄이기 위해 은행 대출을 늘린 것도 이유가 되지만, 작년보다 20% 늘어난 은행 대출은 아무래도 한전채 발행한도를 의식한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전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과거에 한번도 쓰지 않았던 무리수까지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한전은 정관에도 없는 발전자회사의 중간배당을 요구하고 나섰다. 중간배당은 주주친화적 경영의 일환으로 일부 기업이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상 한전이 100% 지분을 갖고 있는 유일한 주주인 발전공기업은 중간배당을 실시할 이유가 크지 않다. 중간배당의 가능여부도 불확실하다. 발전자회사는 이미 낮은 정산조정계수를 적용받고 있어 실적이 저조한 상태에서 중간배당까지 하면 결손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간배당으로 발전자회사의 장기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수원의 재정 악화는 대규모 자금의 조달 비용을 올려 신규 원전 건설, 원전 수출 등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보통 최대주주가 발 벗고 나선다. 유상증자와 같은 최대주주의 출자도 검토된다. 유통 주식 수 증가에 의한 주가하락이 우려되기도 하지만, 적자 기업에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최대 주주의 출자는 시장에 긍정적일 수 있다. 한전의 최대 주주는 산업은행과 정부로 각각 32.9%, 18.2%의 지분을 갖고 있다. 산은도 정부가 100% 출자한 국책은행이기 때문에 한전의 사실상 최대주주는 정부다.
벼랑 끝 한전을 구해내야 한다. 한전법 4조에 따라 한전의 자본금을 최대 6조 원까지 늘릴 수 있다. 현재 자본금은 3조2000억원 정도로 출자할 공간이 남아 있다. 한전 자본금 수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재정여력이 부족한 현실이 야속하다. 지난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영을 비판하는 이유를 여기서도 찾게 된다. 하지만 현실을 탓 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한전의 위기는 에너지산업 전체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한국경제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중대사라는 점에서 비상한 방법도 모두 고려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인 해결방안은 전기요금 인상이다. 그리고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전기요금을 정치에서 떼어내야 한다. "전기요금도 금통위 같은 독립된 기관에서 연료비 원가에 연동해 결정하는 것이 어떤 정부가 됐든 국정운영 부담도 덜고 국민 수용성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라는 한전 사장의 말에 귀 기울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