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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녕 서울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위원회 위원 |
지난달 초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중동의 위기가 확산 조짐을 보이자 다들 반세기 전인 1970~1980년대 중동전 당시의 석유파동 상황을 거론하며 국제유가가 치솟고 물가가 오르며 경제가 나빠질 것이라고 호들갑이다. 한국은행까지 나서서 시나리오 분석을 하며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시절에 우리나라가 중동발 1·2차 석유파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석유파동 극복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처방전은 바로 국내 석탄 증산 정책이다.
정부의 석탄 증산 정책 덕택에 한때 우리나라의 석탄 생산량은 국내 에너지소비의 50% 이상을 감당했다. 석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까지도 국내 가정용 난방연료의 80%를 차지할 만큼 대표적인 에너지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987년 국제유가 하락과 더불어 국내 석탄산업은 전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대부분 도시가스 산업으로 전환했다. 이제 대한석탄공사가 운영하는 마지막 남은 국내 대규모 탄광인 장성광업소가 내년 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지난 50여 년간 세계 에너지산업은 크게 변했다. 21세기 초반에는 미국의 셰일가스와 셰일오일 산업이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자본투자 못지 않게 기술개발투자에 집중한 덕분에 미국은 에너지수출국이 됐고, 에너지산업의 혁신에 성공했다. 유럽은 에너지절약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집중하면서 재생에너지와 청정에너지 분야 전문기업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첨단 IT기술과 빅데이터를 동원해 건물과 공장의 에너지 효율화를 주도하는 회사들이 앞서가고 있다. 최근에는 전통적으로는 에너지산업이 아니었지만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산업이 새로운 에너지산업 혁신을 주도하는 강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에너지산업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에너지산업은 변화와 혁신 면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 2010년 국제유가의 급상승과 함께 일어난 우리나라의 해외자원개발 붐은 공기업 위주로 진행되면서 국제 경쟁력 확보에 실패했다. 가뜩이나 공기업 주도로 해외자원 개발이 진행되다 보니 시장의 변화에 대한 뒤늦은 대응과 느린 혁신 속도로 인해 모두 부실사업으로 전락하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세상에 나가서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해 더 많이 벌어오게 하는 정책 대신, 국내 기업의 비용을 절감시키는 역할에만 그치는 정책이 이어지며 에너지 공기업들은 수십, 수백조원 단위의 빚더미에 올라 있다. 이러는 사이에 중국의 CNOOC등 에너지공기업은 세계 굴지의 규모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국영회사로 성장했다.
중동의 위기가 발생하던 지난 9월 말 국내 대표 에너지기업인 SK이노베이션은 남중국해의 해상유전에서 원유생산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2015년 광구권 확보 이후 8년간 노력한 결과로 국내 민간기업이 광구 운영권을 가지고 자체 기술력을 통해 초기 탐사부터 원유 생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성공시킨 첫 사례다.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했기에 가능한 멋진 성공 사례이다.
아직 희망은 있다.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진 우량한 에너지 기업이 한국에 많이 생긴다면, 중동사태로 물가는 오를지 모르나 경제 발전에는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국제유가가 오를수록 더 많은 매출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력 갖춘 우량 에너지기업이 에너지독립을 이끄는 셈이다. 따라서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산업 역시 공기업이든, 민간기업이든 국제경쟁력의 확보가 최우선이다. 정부의 적극적이며 전폭적인 에너지산업 육성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