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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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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맛의 기준과 규제 그리고 무역 사이의 알고리즘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5.02 08:00

김봉철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EU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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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EU연구소 소장


맥주는 겉보리를 발아시킨 맥아(malt)를 발효시키고 향신료인 홉(hop)을 첨가해 맛과 향을 더한 술이다. 이 술은 기원전 이집트에서도 제조됐을 정도로 곡식을 이용한 발효주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며, 여전히 현대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이제 맥주는 나라마다 고유한 맥주 브랜드가 있을 정도로 보편화 됐다. 맥주는 생산지역의 물과 재료, 주조시설에 따라 맛이 다르기 때문에 지역의 독특한 풍미와 특성이 맥주라는 제품에 녹아있다. 이런 개성을 기반으로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를 창출한다.

1516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 공국은 ‘순수한 맥주란 물, 맥아, 효모, 홉만을 사용해야 한다’라는 내용을 담은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을 제정했다. 사실 이 법령은 바이에른의 제빵업자와 양조업자가 밀과 호밀을 두고 가격을 경쟁하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1871년 독일이 연방으로 통일되면서 채택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독일의 양조장들은 지금도 이 기준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맥주순수령은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수입 맥주의 유통을 제약하는 무역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1988년 유럽사법재판소는 맥주순수령을 폐지하도록 권고했고 1993년 이 법령에 일부 사항만 추가된 ‘독일맥주법’이 제정됐다.

한국에서는 최초의 맥주 양조장 1908년에 서울에 문을 열었고, 1930년대에 맥주가 대량생산되며 시장이 형성됐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은 우리 맥주하면 동양맥주의 OB와 조선맥주의 크라운이라는 브랜드를 먼저 떠올린다.당시 정부가 제한된 일부 기업에만 맥주 제조와 판매를 허용했기 때문에 제품에는 다양성이 없었다. 이 같은 규제는 국내 시장 판매만을 고려한 맥주 제조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업들이 품질의 향상이나 해외시장에 대한 수출 등을 고려할 수 없었다. 이후 국내 맥주시장이 크게 성장했지만 국산 맥주 품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신은 한동안 지속됐다.

최근들어 정부의 주류산업 정책이 규제를 줄이고 수입 다변화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런 규제 완화는 다양한 해외 맥주의 국내 시장 진입으로 국내 맥주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국내 수제 맥주가 등장하며 소비자들은 국내에서 제조된 개성 있는 맥주를 접할 수 있게 됐다. 특히 한국에서는 맥주가 다른 산업이나 문화와 연결돼 독특한 맥주 문화와 산업이 형성됐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탄 K-드라마에서 ‘한국식 치킨’이 소개되며 해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가운데 이 것이 맥주와 결합한 이른바 ‘치맥’ 문화는 해외수출로 이어지며 새로운 산업을 창출했다.

독일과 같은 국가들이 맥주순수령과 같은 기준을 고수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 기준이 식품이나 음료 제조와 관련된 자신들의 전통과 맛을 지키려는 노력이자 자긍심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나아가 이런 규제가 다른 산업적 가치를 창출하거나 확보한다는 의미도 있다. 여러 지리적 표시에 관한 규제라든지 제조방식에 대한 지식재산권 보호와 같은 사항들은 무역에서 중요한 이슈로, 무역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국가와 사회가 무역 갈등을 감내할 수 있을 만큼의 중요한 의미라는 것이다.

한국도 막걸리와 같은 전통주류에 관한 규제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김치와 고추장 같은 식품의 맛에 대한 제조기준의 설정과 규제가 장기적으로는 전통의 보호와 함께 무형의 산업적 가치를 창출하는 보호막이 될 수 있다. 세계를 석권하는 자동차, 반도체, 휴대전화 만큼 경제적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한국의 맛은 다른 가치나 산업을 만나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좋은 한국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중요한 것이다. ‘치맥’을 통해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한국 맥주도 새로운 산업적 경쟁력과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 만큼 무역에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한국 맛’에 대한 기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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