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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 전공 교수 |
최근 미국 공군 메사추세츠 주 방위군 소속의 병사가 게이머들이 애용하는 온라인 채팅 서비스인 디스코드에 대화방을 운영하면서 미국 정부 주요 기밀 문건을 유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출자의 범행 동기는 어처구니 없게 주로 10대 대화방 회원들에게 본인의 능력을 과시하고 온라인 상의 영웅으로 숭배받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현실 사회에서 주목을 못 받는 사람이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온라인에서 자기 과시적 행동을 하는 것은 이미 알려진 패턴이다. 이번 사건도 이와 유사한 온라인 영웅 심리가 배경이다. 이번 사건으로 미국 정부의 민낯이 드러났다. 우선 미국의 허술한 기밀관리 실태다. 어떻게 예비군 격인 일개 주 방위군에서, 그것도 일반 병사인 일병이 수개월에 걸쳐 우크라이나 전쟁 동향과 미국의 동맹 및 적대국에 대한 최신 정보를 온라인에 유출하는 게 가능했냐는 의문이다.
미국국가정보국(DNI)에 따르면 2019년 미국 정부의 일급비밀 자료에 접근 권한을 가진 사람은 125만 명에 달하고 이들 중에는 일반 병사나 민간사업자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2013년 미국 정부가 민간인을 불법 사찰하고 우방국에 대한 감청도 광범위하게 하고 있다고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도 미국국가안전보장국(NSA)의 민간인 계약직 직원이었다. 미국이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를 10년 이상 도청했다는 주장도 이때 제기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도 미국이 계속 기밀 관리 체계 개선을 등한시했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으로 드러났다. 국제사회 리더 역할을 하는 미국이 오히려 국제 안보 불안을 초래한 것이다. 미국의 비밀 관리 체계 개선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다음으로는 미국이 적대국은 물론이고 동맹과 우방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도·감청을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냐는 의문이다. 2013년 스노든 폭로의 핵심은 NSA가 ‘프리즘(PRISM)’이란 도·감청 시스템으로 휴대폰과 구글·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 채팅 서버 등에 접속해 가입자의 개인 정보를 수집해 왔다는 것이다. 당시 도·감청의 주체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앵글로·색슨 국가의 협력체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였다. 파이브 아이즈는 1960년대부터 ‘애셜런(Echelon)’이라는 범 세계적인 통신 감청망과 정보 감시망을 운영해 왔다. ‘프리즘’은 ‘애셜런’의 최신 버전으로, 각종 첨단 디지털 기술이 망라된 고도의 정보 수집 체계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첩보위성 기반 감청망이 대상 국가 통신망을 감시하다 ‘테러’, ‘폭탄’ 등의 위협적 단어 사용이 포착되면 휴대폰 기지국 간 주파수를 가로 채 자동 도청하는 식이다. 2011년 오사마 빈 라덴 추적·사살에 이런 정보 수집·감청망이 적극 활용됐다.
사실 우리나라도 국가정보원과 군 등 안보 관련 핵심 조직에서 주로 북한과 간첩 활동 용의자 등에 대한 합법적 감청을 광범위하게 해 오고 있다. 특히 전방에서 정보작전의 하나로 실시되는 북한 군 통신 감청은 꼭 필요한 조치다. 국익을 위해 외국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추적도 계속하고 있다. 2011년 국가정보원 요원이 한국산 무기 구입 협상을 위해 방한한 인도네시아 특사단이 머물던 호텔 방에 침입했다가 발각된 사건도 있다. 첨단 정보기술 사회에서 도·감청을 안 한다고 생각하는 게 순진한 것이다. 오히려 국익과 안보를 위해 도·감청을 통한 정보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고 하지않는 것은 직무유기다. 우방끼리 서로 첩보전을 수행하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로 국익을 위한 활동이다. 정부가 이번 미국의 도·감청에 대해 불쾌해하면서도 비난을 자제하는 이유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첩보 수집 및 방첩 역량 제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국과 ‘파이브 아이스’ 수준의 정보 공유 확대를 추진해 정보 능력 강화에 나서야 한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한미 안보협력 강화가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요 의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2011년 국정원 침입 사건에 대해 인도네시아는 한국에 형식적인 유감을 표명했을 뿐이고 자국에선 ‘별일 아닌 오해’라고 적극 진화하며 양국 협력 강화를 선택했다. 한국도 정쟁에 매몰돼 미국을 무작정 비난하기보다 양국 협력과 국익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