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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 전공교수 |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총리와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회담을 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관련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 이후 경색된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한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이번 방일은 아무리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간다고 해도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지적과 한국이 일본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야당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추진됐다. 정상회담 성과는 가시적이다. 양국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정상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적용된 수출규제 해소, 대일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철회, 화이트리스트(수출 우대국) 원복 조치를 합의했다.
한일관계 정상화 배경은 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 및 서방과 러시아, 중국 등의 관계가 빠르게 경색되었고 중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앞으로 5년 내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는 전망은 미국과 중국의 군사 대결이 임박했음을 시사한다. 미국은 이에 대한 대비를 이미 시작했다. 우선 국제사회 편 나누기다. 누가 친구이고 누가 방관자며 누가 적인지 분명이하는 것이다.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도 향후 이 지역에 닥칠 풍파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의 갈등과 감정 대립을 극복하고 한·미·일 삼각 대응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군사 역량을 제한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 산업 통제를 위한 칩4 동맹,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빙자한 중국 경제 고립 정책, 인도·태평양 지역 군사 동맹 강화 등 다양한 전략적 포석을 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약해진 러시아의 공백을 중국이 메워 더욱 강해지는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여 러시아의 전력을 낭비하게 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중국이 힘 빠진 러시아를 부양하기 위해 국력을 소모하게 되어 위협이 축소될 수도 있다는 거시적 전략적 판단으로 볼 수 있다.
중국도 이에 대응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국교 정상화 중재 등 중동지역에서 영향력 확대, 우크라이나전 종전을 위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중재, 대만 및 주변국에 대한 압박 강화, 남중국해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군사 대결 확산 등을 시도하여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 고립 및 잠재력 소진 전략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선택은 미국의 압박에 전방위적으로 대응하며 국제사회 영향력을 강화하고 우호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한 중동 지역 등 미국의 전통 우방국을 교란하여 미국의 대중 포위망 구축을 방해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여러 정치적 실험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친미와 반미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좌파 정권은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찾는 시도라고 평가하며 노골적으로 반미, 친북·친중 정책을 구사했다. 한국은 미국이 아니었으면 6·25 한국전쟁 때 공산화돼 지금의 신흥 선진국으로 부자 나라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의 일부 정치 세력은 이 사실이 불쾌하고 이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이 세력은 지금의 한·일 갈등을 초래한 집단이기도 하다.
한미관계 혼란이 한국의 정체성 위기를 초래한 문제라면 한일관계는 더 원초적이다. 한국은 한 수 아래로 생각했던 일본에 식민 지배를 받은 굴욕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은 아직 최근의 기억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간섭을 받으면서 오랜 세월 치욕을 당했지만, 일본에 대한 미움이 크다.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인식과 더불어 독도 분쟁, 일본 정치권의 계속되는 망언, 우파 정서 확산 등의 문제가 한국의 반일 정서를 자극한다.
한일관계를 더욱 악화시킨 건 북한과 중국이다. 북한은 한국을 지원하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갓끈’을 제거하여 한국을 고립시켜 적화한다는 ‘갓끈 전술’을 구사했다. 중국은 사드 문제 등을 꼬투리 잡으며 한미관계를 집요하게 이간질했다. 중국 전통의 ‘오랑캐는 다른 오랑캐로 견제한다’는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해 한국을 괴롭히고 일본과의 관계를 모함하며 한국이 중국에 대한 저항과 대항을 어렵게 조작해왔다.
한일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은 다양하나 현재 국제 정세하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협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미·중 대결의 최전방에 있다. 국제관계에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어제의 적도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또 친구는 아니지만 말이 되는 대상과 아닌 대상이 있다. 냉철하게 누가 내 편인지 구분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공동 이익과 번영을 추구하는 미국과 일본은 적어도 한국 편이다. 중국은 한국 편도 아니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북한은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번 관계 정상화는 단지 양국이 지역 평화에 공동 대응하는 동반자 관계 수립만 아니라 충돌하는 미·중 양대 세력 사이에서 한국의 미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첫 번째 의미 있는 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