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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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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선거구제 개편, 정치발전 도움 되려면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1.09 10:11

송문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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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정치평론가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통해서 대표성이 좀 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새해초부터 정치권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노동·교육·연금개혁을 추진하고 민생 챙기기에도 바쁠 대통령이 갑자기 선거구제 개편이라는 화두를 툭 던진 이유가 무엇일까. 대통령 선거를 치른 후 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극한의 대립구도로 치러졌던 대선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협치가 실종된 국회의 모습을 보며 ‘이대로 가선 안된다’는 답답함의 발로가 아닐까 추측된다.

사표를 줄이고 정치적 다양성을 강화해 지역구도와 적대적인 양당 대결정치를 개선하려는 방향으로의 선거구제 개편논의는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거구 제도만 바꾼다고 정치발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중선거구제 역시 운영에 따라 기득권 양당이 나눠 먹는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작년 6월 지방선거에서 기초의원 선거구 30곳에 중대선거구제가 시범실시되었지만 거대 양당이 아닌 정당이 당선된 사례는 광주와 인천의 4석(정의당, 진보당 각 2석)에 불과했다. 2~5석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라도 거대 양당이 복수공천하는 경우 다당제 실현은 요원하게 된다.

또한 소수정당이 거대정당의 2중대 역할을 하거나 설득과 대화가 아닌 대결정치로 치닫는다면 다당제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한 지역구가 지나치게 커질 가능성도 있고 여성, 장애인, 정치 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오히려 불리하고 중진 의원들 중심의 기득권을 고착화할 위험도 있다.

소선구제하에서도 소수파를 대변하는 비례대표제가 적실성 있게 가미된다면 꼭 다양성을 실현하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비례의석수가 늘어나고 지역구 수가 줄어들면 사표의 문제도 완화되고 스윙지역의 표심이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현행 비례대표제에 대해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국민의 지지가 낮은 것이 큰 걸림돌이다.

선거구제는 매우 복잡하고 각 나라의 정치체제나 정치문화 등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소선거구제로 시작했던 일본은 중선거구제로 갔다가 다시 소선거구와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바꾸었다. 역사적으로 파벌정치가 강한 일본이 2~5인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하면서 공천권을 갖기 위한 당내파벌정치가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현행 대통령제 정부형태와의 정합성이나 역사성 등 제반 여건들을 고려한 바탕 위에서 신중하게 선거제도 설계가 구상되어야 할 것이다. 소선거구제와 결합된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단, 위성정당의 출현을 막는 제도적인 장치와 비례대표의 순위를 국민이 정한다는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선거구제도 등 정치개혁 논의가 기존 정치세력들만의 나눠먹기 잔치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의 뜻을 묻고 의견을 수렴하는 공론의 장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기대해본다. 비토크라시(vetocracy, 극단적 파당 정치)하에서 적대적 공생관계로 서로 이득을 보는 현 정치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면 한국정치의 발전은 요원할 것이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떻게 운용하는가이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통과되었지만 여야 두 당이 서로 욕하면서도 뒤로는 ‘위성정당’을 만들어 편법으로 비례대표를 대거 당선시켰다. 최소한의 정치도의도 저버린 채 어떻게든 꼼수를 찾아내고야 마는 기득권 거대양당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강고한 양당제와 지역구도를 깨는 일은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2/3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해달라"고 요청했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꿈이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권력을 야당에게 넘기더라도 선거구제를 개편하자고 했다.

노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윤 대통령이 재임기간동안 선거구제 개편을 이뤄낼 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당장의 실현가능성과는 별개로 윤대통령이 현재의 질 낮은 정치를 업그레이드할 시스템에 대한 진지한 고민거리를 던져준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기득권의 집착은 집요하고 기득권과의 타협은 쉽고 편한 길이지만 우리는 결코 작은 바다에 만족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개혁에는 강고한 기득권세력의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정치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개편 발언은 정치 기득권 깨기의 일환이다. 기성 정치판에 빚진 것이 없는 0선의 검찰총장 출신 윤대통령이야말로 제대로 정치개혁을 시작할 적임자일지 모른다.

더 매섭게 지적하자면 선거구제도보다는 한국 정치의 질이 너무 형편없다는 점이다. 선거 때마다 줄 세우기와 명분 없는 이합집산, 당대표의 공천전횡과 밀실 공천 등 고질적인 문제가 반복되면서 국민의 정치혐오도를 높이고 있다. ‘특권으로서의 정치’가 아닌 국민의 심부름꾼으로서 ‘사명감의 정치’를 제대로 하는 정치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지형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강제당론제의 남발을 피해 국회의원이 국민대표로서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표결할 기회가 많아지고 국회 상임위에서 여야 교차투표가 활성화된다면 숙의민주주의의 다양성이 한층 강화될 것이다. 여야 거대 양당도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기득권을 내려놓고 정치발전을 위해 먼저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길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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