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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와세다대학교(일본) 국제학술원 교수 |
연일 치솟던 집값이 한번 꺾이더니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불과 1년 전 3000 포인트를 웃돌던 코스피지수도 연중 지지부진한 모양새를 지속하더니 결국 2300선을 크게 밑돈 채 2022년을 마감했다.
새해 경제성장율은 2%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다. 버블 붕괴 뒤 길고 긴 침체를 경험하고 있는 일본처럼 이제 한국도 저성장의 시대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다. 인구감소와 고령화가 계속되는 한, 한국도 저성장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일본의 경험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한 나라의 경제를 얼마나 약하게 만드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1990년대 초 버블이 붕괴된 후 일본이 언제나 불경기였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서 2008년 사이 그리고 2013년에서 2018년 사이에는 활황도 경험했다. 그러나 2000년대의 경기회복은 리먼쇼크와 함께 사라졌고, 2010년대의 경기회복은 미·중마찰,코로나,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며 주저앉았다.
리먼쇼크로 촉발된 2009년의 전세계적 금융위기나 코로나와 함께 시작된 최근의 경기 침체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특별한 것은, 그리고 일본에게 불행한 것은 한번 충격이 오면 다른 나라보다 심하게 경기가 후퇴한다는 것과 충격의 여파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경제성장율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2021년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7%였다. 2020년에는 -4.6%의 역성장이었으니, 겨우 1.7%의 성장은 떨어진 만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2021년 일본의 실질 GDP는 무려 6년 전인 2015년 수준으로 후퇴했다.
일본 경제의 체력이 이렇게 약한 것은 민간소비나 민간투자의 부진 때문이다. 청년인구가 감소하고 노년인구가 증가하는 일본에서는 외부충격이 올 때마다 민간소비와 민간주택투자가 급격히 감소한다. 인구구조가 일본을 따라가고 있는 한국도 이 덫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기저성장을 경험한 일본에서 지난 10여 년간 자살율과 범죄율이 감소하는 등 사회지표는 오히려 개선되었다. 부동산 시장과 고용이 안정되면서 주거와 일자리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버블 붕괴 후 15년간 하락에 하락을 거듭하던 부동산 가격은 이제 경기에 따라 소폭의 등락을 거듭할 뿐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일자리가 모두 증가했다. 부동산 시장의 안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저성장 국가에서 고용은 어떻게 안정될 수 있었을까. 살아 남은 기업들이 성장하며 일자리를 지켰고, 노동시간이 줄고 임금이 동결되면서 더 많은 사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일본기업이 이미 쇠락해서 명을 다하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산요는 공중분해되었고, 샤프는 타이완 기업에 매각되었으며, 도시바는 반도체 부문을 매각하고도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 인식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지금도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저성장 시대 일본에서도 기업은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
20세기 일본 소니의 영업이익 최고치는 1997년도의 5200억엔이었다. 그 뒤로 나락을 걸으며 TV부문에서만 11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던 소니는, 20년만인 2017년에 7350억엔으로 비로서 과거의 기록을 갱신했다. 2021년 결산에서는 1.2조엔이라는 역대 최고의 영업이익을 보고했다.
그러나, 파산 위기까지 몰렸던 기업이라 지금도 긴장감이 대단하다. 워크맨과 컬러TV, 퍼스널 컴퓨터에서 음악/영상,가정용 게임기,화상센서, 로봇으로 이동한 소니는 자동차 제조사인 혼다와 손잡고 소니-혼다-모빌리티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2026년부터 자율주행차를 생산할 예정이다. 기존의 게임 네트워크를 활용해 메타버스 구축에도 도전한다.
도요타도 2021년 결산에서 3조엔에 가까운 역대 최고 영업이익을 보고했다. 지난해에도 전세계 자동차 생산 대수에서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전기차 시장에서는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 도요타는 전기차에 막대한 투자금을 붓기 시작했고, 달 탐사선 개발도 시작했다. 달에서 달리는 2인승 탐사선을 2029년에 실용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요타 계열사인 덴소는 소니와 함께 TSMC가 구마모토에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에 출자했다. 이 공장을 중심으로 차량용 반도체, 화상센서, 자율주행차를 잇는 생태계를 구축하려 한다.
도요타의 또다른 계열사인 도요타통상은 2023년부터 홋카이도에서 일본 최대급 육상 풍력발전 설비를 가동할 예정이다. 54만 킬로와트의 발전이 가능한 설비로 일반 가정 약 18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용량이다. 일본의 신재생 에너지 비중은 22.4%로 한국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지만 유럽에 비해서는 많이 뒤처져 있다. 탄소 중립이 새로운 과제가 된 세상에서 일본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
저성장 시대에도 일본 기업은 진화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진화하지 못한 기업은 도태되었고 진화에 성공한 기업만 살아 남았다.
한국도 저성장 터널에 진입할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진화를 멈추지 않으면, 일본을 뛰어 넘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2023년 새해에도 진화를 멈추지 않을 한국 기업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