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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기업은행 정기주총, 유독 길어진 이유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2.03.24 15:58

디스커버리 펀드 피해자들, '100% 원금보상' 촉구

윤 행장, 디스커버리 등 여러 주주들 의견 청취



일부 주주들 "기업銀 덕에 코로나19 극복"

1시간 동안 이어진 주총...모든 안건 원안대로 의결

기업은행

▲24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에서 기업은행 디스커버리펀드 사기피해대책위원회가 기업은행을 향해 원금 전액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에너지경제신문=나유라 기자] "디스커버리 사모펀드 사태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보상해 달라. 윤종원 기업은행장님이 펀드 판매를 지시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행장님 아니냐."(기업은행 주주)

"조금만 간결하게 (질의)해 달라. 다른 주주들도 있다. 누차 말씀드리는데 오늘 질의는 주총에 상정된 안건 중심으로 말해 달라. 이 건(디스커버리 펀드)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윤종원 기업은행장)


24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는 디스커버리 사태 투자자들의 고성과 이를 말리는 직원들로 소란스러웠다. 지금까지 다른 금융사도 아닌 기업은행에서 이러한 주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예상보다 강한 투자자들의 목소리에 내부 직원들도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날 기업은행 주총 의결 사항은 재무제표 승인의 건, 이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 감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이었다. 통상 금융사들이 회장 선임 및 사외이사 선임 등 굵직한 안건들을 다루는 것과 달리 기업은행의 주총 안건은 주주들 간에 이견이 대체로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기업은행 정기주총이 소란스러웠던 것은, 디스커버리 펀드로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이 100% 원금보상을 촉구하며 기업은행 측과 강하게 대치했기 때문이다. 디스커버리 투자자들은 기업은행 주식을 보유하고 있거나, 다른 주주로부터 의결권을 위임받는 형식으로 주주총회에 참석했다. 기업은행 주주총회 역사상 사모펀드 사태로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이 직접 참석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디스커버리 투자자들의 외침은 주총 시작 한 시간 전인 9시부터 시작됐다. 디스커버리펀드 사기피해대책위원회(대책위)는 이날 본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업은행은 이번 주총에서 배당금을 주당 780원으로 결정했고, 기업은행의 최대주주(지분 63.7%)인 기획재정부는 배당금으로 3700억원을 가져간다"며 "이러한 배당금 잔치에도 불구하고 디스커버리펀드 사기 피해자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기업은행이 충분한 상품 설명과 리스크 고지도 없이 마구잡이로 사기 판매해놓고 고객에게 투자자 자기 책임을 전가하며 당사자 간 협의는 전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는 지난해 5월 기업은행이 판매한 디스커버리 US핀테크글로벌채권펀드와 US핀테크부동산담보부채권펀드에 대해 투자원금의 40~80%를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이후 기업은행은 이후 분조위 조정안을 토대로 피해자들과 합의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한국투자증권이 같은 펀드에 대해 원금 전액을 보상한 점을 들어 기업은행을 향해서도 100%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은행

▲24일 기업은행 본점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


디스커버리펀드 투자자들이 이전부터 이날 정기주총에서 피해 보상을 촉구하겠다고 예고했던 만큼 금융권에서는 윤 행장이 디스커버리펀드 투자자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을 깨고 윤 행장은 디스커버리 투자자를 비롯한 여러 주주의 다양한 의견을 듣는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윤 행장은 주총 안건과 관련 없는 질의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디스커버리 피해자이자 주주들은 "행장님이 의지를 갖고 보상 문제를 해결해달라",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고 투자자들에게 원금을 지급할 여력이 있는데 왜 해결을 안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들의 아우성에도 윤 행장은 최대한 미소를 유지한 채 "방금 말한 안건과 관련없는 사안 같다. 조금만 간결하게 질문을 정리해 달라", "해당 안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주주님의 의견에 대해서는 주총 끝나고 담당 그룹장을 통해 답하겠다"고 밝혔다.

윤 행장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의 고성은 계속됐다. 한 주주가 "안건에 대해 반대 의견이 있다는 데 왜 통과 하냐. 회의를 그런 식으로 진행하냐"고 비난했다. 이에 윤 행장은 "제가 기회를 드렸다"며 일순간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주총에서 윤 행장이 주주들을 향해 목소리가 커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기업은행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주주총회를 15층과 4층으로 분리해서 진행했다. 15층에서 열리는 주주총회 현장을 4층에서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식이었다. 윤 행장은 모니터를 보면서 4층 주주에게도 발언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4층에 위치한 주주들은 발언권이 15층에 모인 주주들 중심으로 부여됐다며 직원들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주주들은 "아무리 손을 들어도 (윤 행장이) 발언권을 주지 않고 무시한다", "왜 4층에 있는 주주들은 발언권을 안주냐",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냐"고 항의했고, 이를 제지하는 직원들은 진땀을 흘렸다.

기업은행

▲IBK기업은행.


이날 주총에서 디스커버리 피해자들의 외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주주들은 기업은행과 윤 행장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자신을 소상공인이라고 소개한 한 주주는 "경영난으로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기업은행이 많은 도움을 줘서 코로나19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기업은행의 이사보수한도가 다른 은행보다 적은 만큼 해당 안건에 대해 찬성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주주는 디스커버리 피해자들을 향해 "주총과 상관없는 발언은 좀 지양해 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주주는 "다른 회사 주총에서는 안건과 관련이 없는 발언을 중지시키고, 주주들을 퇴장시키는데, 기업은행도 회의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기업은행의 배당성향은 다른 금융사에 비해 높은 수준"이라며 "해당 안건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날 투자자들의 아우성에도 기업은행이 배상비율을 상향 조정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금융권의 관측이다. 금감원 분조위에서 권고한 비율 이상을 투자자들에게 배상할 경우 배임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투자증권의 전액 보상이 꼭 펀드 사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정답인지는 의문"이라며 "다른 금융사도 아닌 국책은행인 기업은행 입장에서는 분조위에서 나온 비율 이상으로 배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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