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숭실대 경영대학장 |
차량용 반도체 수요는 꾸준히 늘어가다가 전기차의 확산과 더불어 자율주행 보조기능이 보편화됨에 따라 최근에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반도체 수급에 문제가 생긴 것은 코로나19로 자동차 판매가 감소할 것으로 예측한 완성차 기업들이 차량용 반도체 부품 주문을 줄였으나 예상과 달리 지난해 하반기부터 자동차 판매가 급증한 때문이다. 공급측면에서도 주요 파운드리 공장이 들어선 세계 곳곳에서 지진, 정전, 한파, 가뭄이 발생하면서 차질이 빚어졌다. 여기에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에 불안을 느낀 완성차 업체들이 재고를 쌓으려는 움직임이 더해져 반도체 대란을 심화시켰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를 인프라로 칭하면서 국가안보와 직결시키고 있다. 반도체 수급난은 국가경제의 비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반도체는 단순히 경제 차원을 넘어서 국제 정치적 사안이 되었으며, 이는 과거 오바마,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일관되게 추진되어온 대중 견제 전략과 맞닿아 있다. 바이든의 반도체 가치동맹은 중국에 맞서는 글로벌 반도체 생산밸류체인이다. 그러나 중국내에 반도체 생산기지가 있고, 반도체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중국을 무시할 수 없는 우리나라는 미국 편에만 서기도 난감한 상황이다.
이런 시점에 경제 5단체장을 중심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을 건의하면서 이슈가 되고 있다. 전 세계적 반도체 위기 상황에서 중국과 반도체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의 채찍을 맞지 않고 백신이라는 당근까지 챙겨 오기 위해서는 이재용 부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경제범죄에 대한 사면을 반대하는 입장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중갈등이라는 난감한 상황에서 중국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한국 입장에서는, 선택을 강요하는 미국에게 삼성이라는 민간기업이 미국의 불안을 덜어 주기 위해서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이 향후 미중간 국익외교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차량용 반도체 사업은 작은 시장규모, 다품종 소량생산, 긴 교체주기, 낮은 단가 등으로 돈이 안 되는 분야이다. 수익성이 높은 다른 사업부문을 축소하고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확대한다는 것은 전문경영인이 밀어붙일 수 있는 성격의 의사결정이 아니다.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이 된 것은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장기적 관점에서 대규모의 투자를 과감히 한 데 있다. 이러한 투자는 재벌이라는 한국 특유의 기업 지배구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단기간의 성과에 의해 자리의 보전이 결정되는 전문경영인 체제하에서는 오늘날 반도체 강국인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삼성전자가 일본 전자업계를 이긴 이유로 "일본 전자업체들은 경기 침체기에 투자를 줄이기에 급급했지만, 삼성은 오히려 거액이 투입되는 반도체와 LCD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경기 회복기에 대비했다"고 분석하면서 삼성전자가 경기 침체기에 공격적인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건희 전 회장이라는 오너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일본 전자업체의 월급쟁이 사장들이 몸을 사릴 때 삼성은 오너 회장의 결단으로 과감한 투자에 나서 오늘의 고수익 구조를 창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수익성이 낮은 반도체 생산의 대규모 투자는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중국시장을 걷어차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이기는 하나, 기업의 입장에서는 결코 간단치 않은 결정이며 그룹 오너의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은 국익에도 부합된다고 본다. 해결이 요원한 미중 갈등 속에서 우리의 행로를 찾기 위해서도 전향적인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