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종전 협상이 교착 상태를 이어가는 가운데 글로벌 투자자들은 '아시아 증시가 미국을 앞선다'는 기존 투자 전략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한국, 일본, 대만 등은 중동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만큼 이번 이란 전쟁에 가장 취약한 국가로 꼽혔지만, 아시아가 인공지능(AI) 산업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는 인식이 오히려 기회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인 한국 증시는 방산과 원자력 발전 등 테마가 추가 상승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 AI 기대감에 '아시아 재평가'
28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피델리티 인터내셔널, 노무라 인터내셔널 자산운용, JP모건체이스 등 전략가들은 최근 잇따라 아시아 증시에 대한 강세론을 재확인했다. AI 수요 확대에 따른 기대감, 매력적인 밸류에이션, 높은 성장 잠재력 등이 핵심 근거로 제시됐다.
아시아 증시는 연초부터 AI 수혜 기대 속에 유망 투자처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이 지난 2월 28일 이란을 전격 공습하면서 아시아 증시는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지역으로 지목됐다. 실제로 MSCI 아시아태평양 지수는 지난달 13% 급락했고, 코스피는 약 19% 하락해 블룸버그가 추적한 92개 주요 지수 가운데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달 들어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전날 종가 기준, MSCI 아태 지수는 이달에만 14% 상승해 9.9% 오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를 앞지르고 있다. 이 기간 코스피는 30% 급등해 일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18.6%), 대만 가권지수(24.9%), 인도 니프티 50(7.9%) 등 주요 아시아 지수를 크게 웃도는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장중 사상 처음으로 6700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삭소마켓의 차루 차나나 최고투자전략가는 “아시아가 미국을 아웃퍼폼(수익률 상회)할 수 있다는 서사가 점점 더 설들력을 얻고 있다"며 “거시경제에 대한 확신은 부족하지만 자금은 결국 갈 곳이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AI가 그 대상이며, 아시아는 그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피델리티 인터내셔널의 조지 에프스타소풀로스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북아시아 시장이 상대적으로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며 “미국 성장은 유지되고 있지만 자본은 자사주 매입보다 투자로 이동하고 있으며, 그 상당 부분은 중국 중형주와 한국 메모리 반도체 등 아시아 공급망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빅테크 기업들의 AI 설비투자 사이클이 아시아 경기와 점차 분리되면서 투자자들이 이익 가시성이 높은 업종에 집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1년 코스피 상승률 추이(사진=구글 파이낸스)
◇ “코스피 이익 증가율 212%"…저평가는 여전
아시아 증시의 아웃퍼폼 기대감은 성장 전망에서도 확인된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코스피와 대만 가권지수의 향후 12개월 주당순이익(EPS) 증가율은 각각 212%, 58% 급증할 것으로 예측됐다. 이는 S&P500의 증가율 전망치인 24%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도 AI 수요 확대에 힘입어 강한 실적을 기록했다. 이러한 '어닝 서프라이즈'에 힘입어 해외 투자자들은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신흥국 증시에 이달에만 약 130억달러를 순유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 경우 2년여 만에 최대 월간 유입 규모가 될 전망이라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그럼에도 아시아 증시는 여전히 저평가 상태다.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약 14배로 미국(21배) 대비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BNP파리바는 기술주 강세가 올해 내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며, 실적 모멘텀이 둔화되기 전까지 동북아 증시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노무라인터내셔널웰스매니지먼트의 줄리아 왕 북아시아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피지컬 AI 중심의 차세대 기술 발전에 대한 익스포져를 감안했을 때 아시아 증시가 중기적으로 미국을 아웃퍼폼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 흐름은 최소 3개월 이상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달러 약세도 아시아 증시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라자드, 인베스코 등은 중동 갈등이 완화될 경우 이전부터 이어졌던 달러 약세 흐름이 재개돼 비(非)미국 주식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자주포가 포탄을 발사하는 모습.
◇ 방산·원전까지…“중동 전쟁이 만든 구조적 변화"
이란 전쟁의 영향으로 세계 산업 구조가 아시아 기업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글로벌 군비 확대 흐름과 맞물려 아시아의 방위산업 경쟁력이 부각되고 있다"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LIG디펜스앤에어로스페이스(LIG D&A·옛 LIG넥스원), 현대로템 등은 실적 기대와 대규모 수주 잔고를 바탕으로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고, 유럽 진출 확대를 통해 지배력이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중동발(發) 에너지 위기가 세계적인 탈(脫)화석연료 흐름을 가속화하고 이 과정에서 원전도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은 원전 확대를 검토 중이며 대만은 원자로 재가동을 논의하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일본은 미국과 400억달러 규모의 원전 계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와 핵연료 재활용 협정을 맺기도 했다. 이에 따라 두산에너빌리티, 미쓰비시중공업 등 아시아 원전 기업들이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사진=AP/연합)
◇ 여전히 남은 리스크…호르무즈 봉쇄·빅테크 변수
다만 리스크 요인도 존재한다. 세계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에너지와 산업 원자재 부족으로 아시아 제조업 전반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란은 핵심 '레드라인'을 유지한 채 협상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미국이 대(對)이란 해상 봉쇄를 해제하고 군사행동을 중단할 경우 분쟁 종식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을 우선 재개방하고 핵 프로그램 문제는 후속 협상으로 미루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 문제를 모든 합의의 핵심 조건으로 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 해결 없이는 해상 봉쇄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처럼 종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국제유가는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1일부터 이날까지 7거래일 연속 오름세를 기록 중이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이날 한국시간 오전 11시 23분 기준 브렌트유 7월물 가격은 전장 대비 1.04% 오른 배럴당 102.74달러를 나타냈다.
또한 서방의 리쇼어링(생산기지 회귀) 움직임은 아시아의 이익을 일부 제한할 수 있으며, 기대 인플레이션에 따른 비용 상승은 에너지전환과 방위산업 투자 모두를 지연시킬 위험이 있다고 로이터는 짚었다.
아울러 아시아 증시가 빅테크들의 AI 투자에 의존하는 구조인 만큼 알파벳,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주요 기업의 실적에 따라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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