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현 기후에너지부 기자
“올여름 제가 사는 아파트도 정전을 겪었어요. 더워서 에어컨 사용이 늘어나니 집이 전력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지금 히트펌프를 달면 정전이 더 자주 생기지 않겠어요?"
준공 30년이 넘은 아파트에 산다는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2035년까지 히트펌프 350만 대를 보급하겠다는 정부 목표를 두고 이같이 일갈했다. 아무리 법을 고치고 보조금을 지급해 사용을 장려한다 한들, 구축 아파트의 낡은 배전 체계가 과연 수많은 히트펌프를 수용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구축 건물의 비중이 높은 현실을 고려할 때, 배전 설비 노후화가 히트펌프 보급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경고는 곱씹어볼 만하다. 히트펌프는 천연가스 보일러를 대체하지만, 결국 전기를 끌어와야 작동한다. 건물용 히트펌프 1대의 소비전력은 대개 15kW 수준이다. 개별 건물 단위에서 전기를 안정적으로 수용할 기반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거창한 보급 목표는 현실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사소한 걸림돌이 거대한 정책 목표와 충돌하는 구조가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전기화 국가', '탄소중립', '3대 메가 프로젝트' 같은 화려한 구호 속에 '언제까지 얼마나 확대하겠다'는 식의 약속이 난무하고 있다.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 200GW를 보급하겠다거나,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해 40GW 규모의 전력용량을 신속히 확충하겠다는 계획이 대표적이다. 전력 공급이 시급해지자 신규 대형 원전 건설을 신속히 추진하겠다는 언급까지 나온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강력한 속도전이 필요하지만, 그간의 전력 정책을 돌이켜보면 실행을 막아서는 난관이 적지 않았다. 원전 1기를 짓는 데 이론상 15년 안팎이 걸린다지만, 실제로는 여러 이유가 얽혀 20년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재생에너지 역시 올해 상반기 신규 확충 설비가 약 2GW에 그쳐 정부의 원대한 목표치와는 거리가 멀다. 기자재 공급부터 부지 선정, 행정 인허가까지 제반 여건이 박자를 맞춰야 하나 변수는 늘 존재하는 법이다.
전력 확충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반도체 산단을 비롯한 국가 산업 정책 전반이 흔들린다.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순간 공장은 멈춰 서기 때문이다. 낡은 아파트의 배전 설비처럼 사소해 보이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사전에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냉정히 계산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무리한 목표는 과감히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담대한 구호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정말 실행 가능한가'를 신중히 검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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