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가 31일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열린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미·일·한 협력: 북한의 양자론과 한반도의 미래' 국제심포지엄에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전지성 기자.
(도쿄=전지성 기자) 한일 북한 전문가들이 북한 체제가 경제적 취약성과 강력한 통치가 맞물린 '깨어지기 쉬운 균형(fragile equilibrium)' 상태에 놓여 있으며, 향후 에너지·자원 공급망과 국제 지정학 환경 변화가 체제 안정성을 흔드는 핵심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진단을 제기했다. 또한 북한이 남한과 일본을 적대시하는 '두 국가론'을 내세워 체제 안정을 강화했다는 주장도 나오면서 향후 동북아 정세를 둘러싼 해법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이뤄졌다.
와세다대학교 일미연구소는 31일 도쿄 와세다대학교에서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미·일·한 협력: 북한의 두 국가론과 한반도의 미래'를 주제로 특별강연회 및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애리아 와세다 대학교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와세다대 첨단사회과학연구소와 공동 주최됐으며, 유니코리아재단(UniKorea Foundation)이 후원했다.
이날 행사에선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와 남성욱 서울여대 석좌교수가 한국 측 발표자로 나서 북한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두고 서로 다른 분석을 제시했다. 김병연 교수는 북한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과 에너지·자원 제약을 중심으로 체제 불안정성을 진단한 반면, 남성욱 교수는 '두 국가론'과 핵 전략을 축으로 한 권력 안정과 내부 통제 논리에 주목했다. 두 교수의 발언은 북한 체제가 경제적 한계와 강력한 통치 구조가 교차하는 복합적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며, 향후 미·일·한 협력이 어떤 전략적 접근을 취해야 할지에 대한 시사점을 던졌다.
“북한 체제, '경제 취약성' 위에 선 불안정한 균형"
특별강연에 나선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는 북한 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짚으며 “김정은 정권은 핵 개발이라는 목표는 달성했지만, 경제 특히 주민 생활 개선에는 명백히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김정은은 최근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라며 “대한민국 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공언한 바 있다.
김 교수는 북한이 2013년 제시한 '핵·경제 병진노선'과 관련해 “핵은 목표를 달성했지만, 김정은이 약속한 '쌀밥과 고깃국'은 실현되지 않았다"며 “2017년 이후 유엔 대북 제재 국면에서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은 감소했고, 주민 소득은 약 25%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가 31일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열린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미·일·한 협력: 북한의 양자론과 한반도의 미래' 국제심포지엄에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전지성 기자.
“시장 억압·임금 인상·지방발전…모두 '제로섬'"
최근 북한이 추진 중인 국영기업 임금 대폭 인상, 시장 통제 강화, '지방발전 20×10 정책'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 평가가 이어졌다. 김 교수는 “공장 가동과 지방 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에너지·설비·자본재 수입이 필수적인데, 현재 북한의 대외 환경에서는 이를 지속적으로 조달하기 어렵다"며 “특정 지역의 발전이 다른 지역의 자원 고갈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제로섬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세션에서는 에너지·자원 문제와 국제 지정학 변화가 북한 체제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김 교수는 '미국의 에너지 안보 및 공급망 재편 전략이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 변화가 간접적으로 북한에 파급될 수 있냐'는 질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결될 경우 북러 관계는 현재의 군사 협력 중심 구조를 유지하기 어렵고, 중국 역시 북한을 미국과의 협상 카드로 관리하는 전략을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며 “에너지나 자원 협력이 북한 체제를 안정시킬 만큼 충분히 제공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말했다.
북한이 향후 미·중·러 관계 변화 속에서 중국·러시아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전략적 공간을 넓힐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김 교수는 “북한이 단기간에 진영을 전환할 가능성은 낮지만, 지정학 환경 변화는 체제의 취약한 균형을 흔들 수 있다"며 “김정은 개인 변수, 경제 충격, 국제 정세 변화가 동시에 작용할 경우 예측하기 어려운 전환점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대북 정책 방향과 관련해서는 “관여(engagement)가 장기적 방향이 될 수는 있지만, 타이밍이 핵심"이라며 “제재·압박·협상·정보 유입을 단일 수단이 아닌 '코스 요리'처럼 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급한 협상은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할 위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북한 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단기적 붕괴나 급격한 전환보다는 중장기적 구조 변화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 체제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취약성과 강한 통제가 동시에 작동하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며 “이런 체제는 외부 충격이 누적될 경우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보 유입 확대와 시장 경험의 축적, 세대 교체 등이 장기적으로 체제 인식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북한 문제는 단기간에 해법이 나올 사안이 아니라, 에너지·경제·안보를 아우르는 구조적 접근이 필요한 과제"라며 “미·일·한 협력 역시 군사적 억지에 머무르지 않고 중장기적 질서 재편 전략 속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체제가 단기간에 흔들릴 가능성은 제한적 “'두 국가론'과 핵 전략…권력 안정이 우선"
다만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북한 체제가 단기간에 흔들릴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남성욱 숙명여대 석좌교수가 31일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열린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미·일·한 협력: 북한의 양자론과 한반도의 미래' 국제심포지엄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전지성 기자.
이어진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한미일 협력'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남성욱 서울여대 석좌교수는 최근 북한이 남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한 이른바 '두 국가론'의 배경을 체제 안정과 권력 유지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남 교수는 “김정은은 집권 15년 동안 내부 권력 장악에 성공했고, 고모부 장성택 처형은 오히려 체제 불안이 아니라 안정의 신호였다"며 “처형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북한 체제는 더 불안해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두 국가론'을 체제 붕괴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 안정과 내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란 해석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권력 장악은 상당 부분 마무리됐으며, 핵 무력 고도화는 체제 억지와 내부 결속을 동시에 겨냥한 수단이라는 설명이다.
남 교수는 북한의 적대국 노선이 돌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2000년대 이후 남한 물자·문화 유입에 대한 체제 위기의식이 누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북 지원과 함께 한류와 남한 문화가 확산되자, 북한 당국은 이를 체제 위협으로 인식했고 2020년 이후 '3대 악법'을 제정하며 남한식 표현과 문화 유입을 강력히 차단했다"며 “2024년 1월 남북 관계 단절 선언은 이러한 흐름의 종착점"이라고 말했다.
핵 정책과 관련해서는 “북한은 이미 핵 보유를 전제로 체제 전략을 재편하고 있다"며 “과거에는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핵을 쓰지 않는다'는 논리를 사용했지만, 남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을 핵 사용 대상에 포함시키는 논리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내부 단속과 대외 억지를 동시에 겨냥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북한 외교의 70%는 러시아…전쟁 전까진 변화 제한적"
남 교수는 향후 북한 외교의 최우선 순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그는 “북한 외교의 약 70%는 러시아에 집중돼 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 이후 군사·기술·경제적 이득을 얻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남북 대화나 본격적인 대미 협상이 재개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다만 그는 “미국이 군축 회담 차원의 접근을 시도할 경우 북한이 협상에 나설 여지는 있다"고 덧붙였다.
두 발표는 같은 북한 체제를 두고도 경제적 취약성과 권력 안정이라는 상반된 축을 강조했지만, 공통적으로 북한 문제가 단순한 군사·외교 사안이 아니라 구조적·장기적 접근이 필요한 과제라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한국과 일본 안보 전문가들이 31일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열린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미·일·한 협력: 북한의 양자론과 한반도의 미래' 국제심포지엄에서 패널토론을 하고 있다. 사진=전지성 기자.
이날 참석한 양국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이러한 상반된 분석이 오히려 미·일·한 협력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고 평가했다. 군사적 억지와 제재뿐 아니라 에너지·경제·정보 유입을 아우르는 입체적 접근 없이는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구축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일본 무로오카 데쓰오 전 일본방위연구소 이론연구부장은 북한의 '2국가론'과 핵 전략을 단순히 남북관계 차원의 문제가 아닌, 동북아 질서 전반을 재편하려는 전략적 신호로 해석했다. 그는 “북한이 남북관계를 '통일의 대상'이 아닌 '적대적 공존 관계'로 재정의함으로써, 향후 미·일·한 안보 협력 구도에 균열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특히 일부 일본 측 토론자는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을 체제 생존 수단을 넘어 협상 지렛대이자 국제 질서 내 지위 확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북한이 미·중 전략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등 국제 정세의 복합 위기를 활용해 자신들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려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일본·미국 간 정책 공조의 빈틈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 측에서는 또 대북 접근법을 둘러싼 한·미·일 간 시각 차이 역시 주요 변수로 언급됐다. 군사적 억제와 제재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함께, 장기적으로는 위기 관리와 오판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대화 채널 유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는 김병연 교수의 '경제 제재의 구조적 효과' 분석, 남성욱 교수의 '북한 권력 구조와 전략 계산' 분석과 맞물리며, 북한 문제를 둘러싼 접근법의 다층성을 부각시켰다.
▲이종원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UNIKOREA)상임이사가 31일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열린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미·일·한 협력: 북한의 양자론과 한반도의 미래' 국제심포지엄에서 패널토론을 하고 있다. 사진=전지성 기자.
이날 행사의 폐회 발언에서는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일 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이 강조됐다. 이번 국제심포지엄을 후원한 이종원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UNIKOREA)상임이사는 “그동안 한일 관계는 항상 미국이 가운데 있는 구조였고, 상호 불신 속에서 미국이 없는 한일 협력은 거의 없었다"며 “국가 간 협력은 공동의 문제나 이익이라는 절박한 계기가 있을 때 이뤄지지만, 지금까지 한일 간에는 그러한 계기가 분명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이사는 최근 국제질서가 다자주의에서 자국우선주의, 미·중 패권 경쟁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다자주의의 쇠퇴는 한미일 공조를 약화시킬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한일 협력을 강화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북한의 '두 국가론'과 남한 문화 차단, 내부 통제 강화 움직임을 두고 “체제 내부의 불안정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을 반드시 포함하지 않더라도, 북한 체제 변화라는 변수를 염두에 두고 일한·한일 간 협력의 기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북한 문제를 군사·외교 차원을 넘어 경제, 에너지, 지정학을 아우르는 구조적 문제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와세다대 일미연구소는 앞으로도 미·일·한 협력과 동북아 평화 구축을 주제로 한 학술·정책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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