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난방 겸용 공기열원 히트펌프의 외부 열교환기. (사진=위키피디아)
겨울철 난방의 표준이었던 석유·가스 보일러를 대신해 '히트펌프(Heat Pump)'가 차세대 난방 기술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히트펌프는 화석연료를 태워 열을 직접 만들어내는 장치가 아니라, 이미 주변에 존재하는 열을 다른 공간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구조적 차이는 난방비 절감과 온실가스 감축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열을 '만들지' 않고 '옮긴다'…냉장고와 비슷한 작동 원리
히트펌프의 기본 원리는 냉장고와 같지만, 실제 작동 과정은 그 반대다. 냉장고가 내부의 열을 외부로 내보내 음식물을 차갑게 하는 것처럼 히트펌프는 바깥 공기나 땅, 물 속에 있는 열을 실내로 끌어와 난방에 활용한다.
많은 사람이 “겨울철 차가운 공기에 무슨 열이 있느냐"고 묻지만, 영하의 공기에도 분자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절대온도 0K(–273.15℃)가 아니라면, 영하의 공기에도 열에너지는 존재한다. 히트펌프는 바로 이 미세한 열을 모아 쓴다.
히트펌프는 냉매가 순환하는 구조를 통해 열을 이동시키는데, 그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뉜다.
▲(자료=기후에너지환경부)
먼저 증발기에서 냉매가 외부 열을 흡수하며 기체로 변한다. 이어 압축기에서 냉매를 압축해 온도와 압력을 급격히 높인다. 이때 전기는 열을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압축기를 구동하는 데 사용된다. 다음으로 응축기에서 고온·고압의 냉매가 실내 배관을 지나며 열을 방출하고 액체로 변한다. 마지막으로 팽창 밸브를 통해 냉매의 압력과 온도를 낮춰 다시 증발기로 보내며 이 과정이 반복된다. 냉장고에서 볼 수 있는 구조다.
열을 어디에서 끌어오느냐에 따라 히트펌프는 공기열, 지열, 수열 방식으로 구분된다.
◇가스보일러 대비 3배 높은 효율
히트펌프의 가장 큰 강점은 에너지 효율이다. 일반적으로 히트펌프는 전기 1kWh를 사용해 3~5kWh에 해당하는 열을 공급할 수 있다. 이를 성능계수(COP) 또는 계절성능지표(SPF) 3~5로 표현한다.
반면 전기히터는 전기 1을 넣어 열 1을 얻는 구조이고, 가스보일러는 연료 연소와 배관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한다. 구조적 차이만으로도 히트펌프는 보수적으로 약 3배의 효율 우위를 가진다.
온실가스 감축 효과는 더욱 분명하다. 가스보일러는 연소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직접 배출하지만, 히트펌프는 사용 단계에서 직접 배출이 없다. 온실가스 배출은 전력 생산 단계에서만 발생하며, 전력 부문의 탈탄소화가 진행될수록 히트펌프의 환경적 이점은 자동으로 커진다.
이 같은 효과는 국내 학술 연구에서도 수치로 확인됐다.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 최준영 수석연구원과 이기원 주임연구원이 지난달 '대한설비공학회 논문집(Korean Journal of Air-Conditioning and Refrigeration Engineering)'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국내 단독주택 난방·급탕 시스템을 고효율 전기 히트펌프로 전환할 경우 연간 약 364만 톤의 CO₂를 감축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단독주택 난방·급탕 부문 배출량의 약 36%에 해당한다.
연구진은 난방열 1GJ(기가줄)을 생산할 때 발생하는 배출량을 비교한 결과, 도시가스 보일러는 약 62kgCO₂를 배출하는 반면, 전기 히트펌프는 SPF 3.0을 적용할 경우 약 40.7kgCO₂ 수준으로 낮아진다고 밝혔다. 열 단위당 배출량이 약 30% 수준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유럽연합(EU)에서 2019~2023년 히트펌프 시장 성장. 연간 판매량이 지금처럼 약 300만 대 수준으로 유지된다면 오는 2030년 EU 기후 목표를 달성에 필요한 히트펌프 설치댓수가 1500만 대 미달할 전망이다. (자료=Progress in Energy, 2025. https://doi.org/10.1088/2516-1083/ade94a)
◇해외에서는 전력망 안정에도 기여
해외에서는 히트펌프가 단순한 전력 소비 설비를 넘어, 전력망 안정에 기여하는 자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럽에서 히트펌프는 난방 부문의 전기화를 통해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강화할 수 있는 핵심 기술로 평가된다.
스위스 취리히공대 연구팀은 지난달 내놓은 보고서를 통해 히트펌프와 전기차를 유연하게 제어할 경우, 2050년 기준 전력 수입을 약 20% 줄이고 겨울철 도매 전력 가격을 최대 6% 낮출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단열 기준을 충족한 주택에서는 외부 기온이 0℃일 때도 히트펌프를 최대 10시간 꺼두어도 실내 온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영국 사우샘프턴대학교 패트릭 제임스 교수가 주도한 연구 역시 스마트 제어 히트펌프가 피크 시간대 전력 수요를 최대 90%까지 낮추면서도 주거 쾌적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실증했다. 해당 결과는 지난 10월 국제학술지 '응용 에너지(Applied Energy)'에 발표됐다.
사우샘프턴대학 에너지·기후변화학과의 패트릭 제임스 교수는 “우리 연구는 히트펌프가 쾌적한 난방을 제공하는 동시에 전력망이 혼잡한 시간대에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서 “ 스마트 제어를 통해 히트펌프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에너지 시스템의 회복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공과금까지 절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력·에너지 전환 분야의 국제 에너지 싱크탱크인 엠버(EMBER)는 지난 17일 히트펌프와 관련된 보고서를 통해 “히트펌프의 기술적 효율성은 이미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보급이 더딘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가격 구조'에 있다"고 지적했다.
많은 유럽연함(EU) 국가에서 전기요금에 각종 세금과 정책 비용이 집중적으로 부과되면서, 전기가 가스보다 2~4배 비싸게 책정돼 히트펌프의 효율 이점이 상쇄되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히트펌프 확산의 관건으로 전기요금 체계 개편을 지목한다. 재생에너지 지원금이나 비에너지 정책 비용을 전기요금에서 분리하거나, 가스 쪽으로 이전할 경우 전기·가스 가격 비율이 크게 낮아져 히트펌프의 경제성이 개선된다는 분석이다. 네덜란드처럼 전기요금 부담을 낮춘 국가는 실제로 히트펌프 보급률이 다른 국가보다 월등히 높다.
결국 히트펌프 확산은 개별 가구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전기화 시대에 맞지 않는 요금·세제 구조를 어떻게 바꾸느냐의 문제다. 전기를 가장 청정하고 저렴한 에너지원으로 만드는 정책 전환이 이뤄질 때, 히트펌프는 기후 대응 수단을 넘어 유럽 에너지 전환의 '표준 난방 기술'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아파트 발코니에 설치된 히트 펌프. (사진=위키피디아)
◇에너지 믹스도 중요…재생에너지 비중 높아야 효과
난방의 전기화는 전력 소비 증가를 동반한다.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연구에 따르면 국내 단독주택을 모두 히트펌프로 전환할 경우 연간 전력 소비는 약 14TWh(테라와트시, 1TWh=10억 kWh)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전체 전력 소비의 약 2~3% 수준이다. 연구진은 단열 개선과 스마트 제어를 병행할 경우 전력 피크 부담은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히트펌프의 탄소 감축 효과는 전력 생산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지난달 초 국회예산정책처는 석탄과 액화천연가스(LNG) 비중이 높은 전력 믹스에서는 감축 효과가 제한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재생에너지 확대와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력의 탄소 배출계수가 낮아질수록 히트펌프의 감축 효과는 커지며, 전력 부문이 완전 탈탄소화될 경우 난방 부문의 배출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워진다.
국회예산정책처는 “히트펌프를 통해 탄소배출을 저감하려면 신재생에너지 전력설비가 구축되어 있는 가구를 우선 지원대상으로 선정할 필요가 있다"며 “향후 탄소배출 저감 효과를 면밀히 파악한 뒤 중장기 사업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히트펌프가 사용하는 공기열을 재생에너지로 인정할 것인지도 중요한 쟁점이다. 유럽 다수 국가는 공기열을 재생에너지로 분류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법적 지위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정부는 관련 법령 개정을 추진 중이며, 인정될 경우 공공기관 의무비율과 제로에너지건축 인증에서 활용 폭이 크게 넓어질 전망이다.
▲금한승 기후에너지환경부 1차관이 지난 10월 26일 경기 안성시 농가에서 지열-공기열 히트펌프를 활용한 관엽식물 재배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기후에너지환경부 제공])
◇보급의 관건은 비용과 제도
정부는 히트펌프를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 달성의 핵심 수단으로 삼고, 2035년까지 350만 대 보급을 통해 이산화탄소 518만 톤의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높은 초기 설치비, 공간 제약, 전기요금 누진제는 여전히 큰 장벽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내년 583억원을 투입해 가구당 초기설치비 100만원가량을 지원할 계획이다.
하지만 가정용 히트펌프 설치비는 1,000만 원을 넘는 경우가 많아, 보조금을 적용해도 가구 부담이 크다. 실제로 기후부가 추산한 가구당 히트펌프 설치비는 1400만 원으로, 정부 보조(560만원)와 지방비(280만원)를 제외하더라도 가구당 560만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저소득층이나 에너지 취약계층이 참여하기에는 진입 장벽이 높다.
반면 사우나나 수영장처럼 온수 사용량이 많은 시설에서는 가스 대비 15~20%의 비용 절감 효과가 이미 확인되고 있다.
정부는 전용 전기요금제 도입, 초기 설치비 지원, 노후 주택 단열 개선과 연계한 그린리모델링 등을 통해 보급 속도를 높일 계획이다.
히트펌프는 단순한 보일러 교체 기술이 아니다. 연료를 태우는 난방에서, 열의 흐름을 관리하는 난방으로의 전환이다. 비용과 탄소, 전력망과 산업 구조까지 함께 바꾸는 변화다. 난방의 미래는 더 이상 불꽃에 있지 않다. 열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다루느냐가 에너지 전환의 성패를 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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