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관세 전쟁, 중국산 제품의 품질·물량 공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유가·물류 불안, 요동치는 환율, 내수 경기 위축. 국내 기업의 경영 불확실성을 높이는 대내외 요소들이다. 이른바 '복합위기'에 허우적대는 재계가 설상가상 '모래주머니'까지 발목에 찰 처지에 놓였다. 정부·국회가 각종 반(反)기업성 정책과 규제를 쏟아내면서다. 노조법과 상법은 기업에 불리하게 개정되고 법인세는 오른다. 주52시간 근무제, 중대재해처벌법 등은 보완 대신 더 강력해질 전망이다.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고 청년 고용이 줄어든다"는 재계 목소리는 허공을 떠돌 뿐이다. 에너지경제신문은 사면초가에 빠진 기업의 상황을 진단하고, 한국 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한 방향성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국회에서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일명 노란봉투법)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7월 임시국회 마지막날인 5일 본회의 처리가 무산되기까지 한달여. 재계에는 그야말로 '초비상'이 걸렸다. 한국과 미국 관세협상이 막판까지 타결되지 않아 가슴을 졸이는 시기였지만 기업들 시선은 온통 국회로 쏠렸다.
경제단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개정안 논의를 멈춰달라고 촉구했다. '산업 생태계가 무너진다'는 호소를 담은 대국민 담화도 연이어 쏟아졌다.
그러나, 경영계 우려와 호소에는 아랑곳 않고 거대여당은 8월 임시국회서 노란봉투법 통과를 '일방통행'으로 감행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재계는 파장과 사후 대응에 걱정이 태산이다.

▲4일 국회 본회의에서 신동욱 국민의힘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초 이날 처기하로 한 노란봉투법을 오는 21일 본회의에 상정한다는 방침이다.
경제계 “사용자 범위 무분별하게 확대···원·하청 간 산업생태계 무너질 것"
5일 재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노란봉투법 핵심은 사용자 범위를 넓혀 하청 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고, 노조나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범위를 제한하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기업이 파업 등 쟁의행위로 입는 손해에 대한 손해배상·가압류 행위가 제한된다. 사용자 범위는 '실질·구체적으로 근로조건을 지배·결정하는 자'로 사실상 무한정 확대된다고 재계는 우려한다.
노란봉투법은 윤석열 정부 당시 두 차례 국회를 통과하고도,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막혀 폐기됐다. 지난달부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법안 통과에 속도를 내면서 지난달 2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 회의 문턱을 넘었다. 4일 국회 본회의 통과가 여당 측 목표였지만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펼치면서 8월 임시국회로 순연됐다.
재계는 노란봉투법에 '불법파업 조장법'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극렬히 반발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 대한건설협회 등은 지난달 30일 '노조법 개정 중지 촉구를 위한 공동성명'을 내고 “개정안은 사용자 범위를 무분별하게 확대해 원·하청 간 산업생태계를 붕괴시키고 우리 산업경쟁력을 심각하게 저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우리 경제를 떠받드는) 자동차·조선·건설업이 다단계 협업체계로 구성된 상황에서 노란봉투법 통과 시 원청 기업들을 상대로 끊임없는 쟁의행위가 발생할 것"이라며 “노조법상 사용자에 대한 다수 형사처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추상적이고 모호한 사용자 지위 기준은 우리 기업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고 경영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기업은 노조의 불법행위에 사실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어 산업현장은 1년 내내 노사분규와 불법행위로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며 “기업들은 경영효율화와 노동생산성 향상은 고사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지난달 31일 경총회관에서 열린 '노조법 개정 관련 긴급 기자회견'에서 노란봉투법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산업현장 이미 '귀족·강성노조' 폭력 시위에 몸살···노사 대화 통해 접점 찾아야
재계가 이렇듯 노란봉투법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이미 우리나라 산업현장이 '강성노조'의 폭력적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일찍부터 쟁의행위가 활발했던 자동차 업종에서는 사측이 작업장 와이파이 제공을 하지 않는다고 해 공장라인을 쇠사슬로 묶는 등 불법 행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일각에선 노조가 '거대 권력'으로 작동하며 불법을 저지른 가담자에게 면죄부를 주라고 사측을 압박하는 게 사실상 관행이 돼 버렸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산업계 한 관계자는 “자동차처럼 컨베이어벨트 형식으로 작업이 이뤄지는 곳은 한 부분만 막혀도 전체 제품 조립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한두명만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하면 사측이 당장 손해를 막기 위해 업무강도를 줄이는 식으로 노사합의가 지속되다보니 우리나라 제조업이 '고임금 저효율' 구조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등이 노란봉투법에 '경고'를 날리는 반응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대목이다. 한국지엠이 노조 때문에 국내에서 철수한다는 얘기는 증권가 등에서 기정사실화된 상태기 때문이다.
한국지엠 노조는 지난 2018년 부평공장 내 사장실을 무단 점거하고 집기를 부수며 외국인 사장을 협박한 전례가 있다. 적자에 허덕이는 회사가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 본사는 같은해 군산공장 폐쇄 결정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노란봉투법 취지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산업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여당이 정치적 셈법으로 무리하게 법안을 추진하다가는 실제 '역풍'이 생길 수 있다는 게 재계 안팎 대부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노란봉투법은 지난 2013년 쌍용자동차(현 KG모빌리티) 정리해고 사태와 관련이 있다. 정리해고에 반발해 파업을 벌인 노조원들에게 사측은 47억원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했다. 법원은 이를 인정했지만 노동자들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시 정리해고 배경은 2004년 쌍용차를 인수한 중국 상하이자동차가 '기술 먹튀'를 한 것에 있다. '나쁜 자본' 대주주가 약속을 어겨 힘없는 노동자들이 피해를 본 그림인 셈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란봉투 캠페인'에 참여했던 것도 상황 자체가 노동자들에게 억울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대기업 노조의 경우 자신들만의 '진입 장벽'을 쌓고 부를 독차지하기 위한 욕심만 부리고 있다. 자동차, 조선, 철강 등 기존 산업군 뿐 아니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노조도 무리한 임금인상과 성과급을 요구하고 있다.
SK하이닉스 노조는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는 이유로 1인당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억대에 달하는 성과급 보상을 요구하며 올해 임금협상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올해 초 기본급 1500%의 초과이익분배금을 받고 격려금 차원에서 자사주 30주(600만원 상당)을 받았지만 이조차 모자르다고 한 것이다. 이 회사 노조는 “지금부터 우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강경 투쟁의 최종 국면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거대 노조'가 사측을 압박해 인건비가 오르면 회사는 비용 절감을 위해 다른 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경영진들은 2·3차 협력사 납품 단가를 낮추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는 결국 협력사 직원 임금이 낮아지고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 문제를 키우는 원인이 된다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해 주요 비금융 상장사 사업보고서를 분석해보면 매출 100대 기업 중 평균 연봉이 1억원을 넘는 곳 수가 절반을 넘었다. 2019년에는 9개사뿐이었지만 2022년 35개사, 지난해 55개사로 매년 느는 추세다. 반면 중소기업 임금 상승폭은 크지 않아 임금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란봉투법이 사용자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의 경우 '귀족노조'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는 아니다. 대기업 노조가 힘을 앞세워 부를 독점하는 동안 목소리를 잃었던 하청 노동자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점은 눈여겨볼 요소다. 다만 이로 인해 사측과 하청업체 노동자간 갈등의 골이 깊어질 경우 경영심리 위축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게 재계의 걱정이다.
전문가들 역시 해당 내용은 경영계가 양대노총 등 기득권 정치세력이 아닌 '진짜 노동계'와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오는 21일부터 24일까지 본회의를 열어 노란봉투법 등 쟁점 법안을 처리한다는 입장이어서 재계는 다시 숨죽이며 정치권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