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주의 경제읽기] 관세 폭풍 속 막판 타결…韓·美 협상의 득과 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5.08.01 10:00

박원주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원주

▲박원주 전 청와대 경제수석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한미 관세협상이 30일 타결되었다. 25% 상호관세 부과시한이었던 8월 1일 을 겨우 이틀 앞두고 급박하게 결론이 내려졌다. 이미 일본, EU 등에 대한 15% 상호관세 부과가 확정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특별한 묘수는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소한 일본, EU보다 못하지 않은 결과를 얻어 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시급한 목표였을 것이고, 미국 또한 다른 나라들과 차별화된 내용을 우리에게 제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그 짧은 시간에 다른 나라들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내용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은 우리 협상팀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상호관세와 자동차에 대한 품목별 관세를 15%로 낮춰주기로 했고, 반도체나 의약품 등의 수출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조건의 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우리나라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를 조성해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이 중 1,500억 달러는 미국과의 조선산업 분야 협력을 위한 투자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이 펀드가 미국이 원하는 분야에 투자하는 것이고 그 수익의 90%가 미국에 남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유재산권과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투자를 집행하겠다는 뜻은 아니리라 믿는다. 또한 우리나라는 1,000억 달러 상당의 천연가스 등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농산물시장 개방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는 쌀과 소고기시장을 지켰다고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산 농산물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고 말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협상의 내용이 더 소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반도체·조선…'잃은 것'과 '얻은 기회'


전체적으로 보면, 2007년 4월 한미FTA 타결 이후 18년간 자유무역의 깃발 아래 미국 시장에서 마음껏 보폭을 넓혀 온 우리 기업들이 앞으로는 일본, EU 등 경쟁국들과 맨바닥에서 치열하게 경합해야 하는 시대가 열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간 무관세 혜택 아래 다른 나라 기업들보다 탁월한 가격경쟁력을 구가했던 우리 자동차 기업들이 2.5%의 핸디캡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된 점이 꽤나 뼈아프다. 하지만 반대로 새롭게 시장 기회가 열리는 부분도 있다. 조선산업의 경우 글로벌 마켓에서 늘 중국과 박터지는 경쟁을 해야 했고, 시장 점유율 확대가 과잉투자와 수익성 악화,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협상 결과로 우리와 미국이 조선산업분야의 이해를 공유하게 된다면, 중국을 따돌리고 안정적인 시장기회를 선점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1,500억달러의 소위 마스가 투자펀드가 어떻게 설계되고 집행될지 큰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번 협상 결과를 냉정하게 평가해 본다면,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많은 부분이 불확실하고, 각국의 손익 계산서 또한 앞으로의 이행 스케줄과 그 내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예를 들어 각국의 대미 투자펀드 규모에 대해 들여다 보면, 2023년도 일본의 대미 투자 잔액은 7,833억달러에 달하나 우리 투자잔액은 그 10%에 불과하다. 연간 대미투자도 그 액수가 크게 늘었던 2023년 기준으로 66억달러에 그치고 있다. 앞으로 4-5년간 3,500억달러의 투자를 이행하려면 매년 2023년의 10배 이상 미국에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이 기존 투자잔액을 제대로 운용한다면 자국경제에 큰 부담없이 용이하게 투자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우리는 생니를 뽑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투자에 매달려야 할 판이다. 이런 투자가 미래 우리 경제의 성과로 이어지게 하려면 미국 마음대로 투자자금이 흘러가게 방치해서는 안된다. 어떻게든 보다 생산적이고 양국간 산업협력이 유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투자의 구체적 내용과 시간표를 설계해야 한다. 관세의 벽에 막혀 망연자실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줘야 한다.




투자·에너지 '천문학적 숫자, 실행의 난제는 없나


미국산 에너지 수입 또한 만만한 일은 아니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가 미국에서 수입하는 천연가스는 전체 수입량의 12%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미국은 호주, 카타르, 말레이시아에 이은 제 4위 천연가스 공급국이다. 우리가 세계 3위의 천연가스 수입 대국이라고 하지만 연간 총천연가스 수입액은 대체로 500억달러선에 그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산 에너지 1,000억달러를 사오려면 호주, 카타르, 말레이시아 등으로부터의 천연가스 도입을 크게 줄여야 하는데 건드리기 곤란한 장기도입계약 물량을 고려하면 이렇게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호주 등 지금의 대량 공급국들의 반응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자기 시장을 뺏기는 이 나라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에 따라 전혀 엉뚱한 분야에서 우리 시장이 영향을 받을 위험이 적지 않다. 이번 협상에서는 논의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미국에서 대량의 천연가스를 사 오려면 알래스카의 LNG 개발 프로젝트에 코가 꿰일 우려도 적지 않다. 어차피 지 멋대로 협상을 끌고 왔던 미국이 “한국이 책임지고 투자해서 파 가라"고 배짱을 부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나?


구속력이 확보되지 않은 이번 합의의 불안정성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어차피 기존에 우방국들과 맺었던 자유무역협정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새로운 관세 협정을 밀어붙인 미국의 입장에서 앞으로 더 무리한 요구를 한다 한들 더 이상 체면이 구겨질 일도 없다. 우리가 약속했던 것들이 이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혹은 새롭게 부각되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맞추어서 또다시 고율관세라는 칼날을 우리 목에 들이댈 가능성은 적지 않다. 트럼프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내는 이상 우리는 언제까지고 미국의 '불공정 무역국가'일 수 밖에 없다. 우리 정부가 '협상은 이제 막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앞으로도 계속 정보를 모으고 흐름을 읽어가면서 대미교역의 상황을 개선시켜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불확실성을 이겨낼 후속 전략이 중요


사실 이번 합의에서 평가를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보다는 미국이다. 트럼프는 전 세계를 상대로 미국시장에 들어오려면 고율의 관세나 거액의 투자자금을 내놓아야 한다는 기괴한 '뉴노멀'을 제시했다. 앞으로 트럼프가 사라진다 해도 미국의 정책방향이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다. 관세를 통해 새롭게 확보되는 막대한 재정수입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면 정권을 내놓아야 할 정도의 정무적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미국의 차기 정부가 그 정도로 용기 있는 선택을 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가 휘저어 놓은 이 흙탕물이 가라앉았을 때의 세계 경제질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리더로서 미국이 지난 100여년동안 쌓아 왔던 막대한 무형자산이 탈탈 털린 미래를 생각해 보면 딱 두 가지 키워드가 떠오른다. '미국이 보이지 않는 세계' 그리고 '각자도생'.


트럼프의 몽니를 피곤할 정도로 오랫동안 지켜 보면서, 천년제국 로마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두 아들에게 나라를 쪼개 주는 악수를 두어야 했던 늙은 황제 테오도시우스1세의 외로운 말로를 연상하는 것은 과연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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