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 포토

곽인찬

paulpaoro@ek.kr

곽인찬기자 기사모음




'시럽급여' 비유가 불편한 이유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7.18 13:28
ㄴ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가운데)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실업급여 제도개선 공청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실업급여 개선이 동력을 잃었다. ‘샤넬 선글라스’와 ‘시럽(Syrup) 급여’ 탓이다.

자초한 일이다. 지난 12일 공청회에서 실업급여 담당 공무원은 "남자분들 같은 경우 어두운 표정으로 오시는데 여자분들이나 젊은 청년들은 계약기간 만료된 이 기회에 쉬겠다고 온다"고 말했다. 이어 "실업급여를 받는 도중에 해외여행 간다. 내가 일했을 때 살 수 없었던 샤넬 선글라스를 사든지, 옷을 사든지 이런 식으로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실업급여가 악용돼 달콤한 보너스라는 뜻의 ‘시럽급여’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말했다.

야당은 호재를 만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4일 "노동자 스스로 내는 부담금으로 실업급여를 받는데 마치 적선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정부·여당 태도가 참으로 한심하다"고 말했다. 박광온 원내대표는 "실업급여 받는 분들을 조롱하고 청년과 여성 구직자, 계약직 노동자를 모욕하고 비하했다"며 "실업급여를 받는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준석 전 국힘 대표도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이 전 대표는 1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실업급여를 받아서 소고기를 먹든, 명품을 사든 그건 개인의 자유"라고 말했다.

◇정부·여당 해명

정부와 여당은 즉각 해명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1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답변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작년(2022년) 9월 상당히 권위 있는 ‘한국 경제 보고서’를 발표했다"며 "우리나라의 기여 기간 대비 실업급여가 세계에서 제일 높고, 취업해서 받는 수입보다 실업급여가 많은 점을 빨리 개선하도록 권고했다"고 말했다.

박대출 의장은 14일 페이스북을 통해 "일하는 사람은 179만원 받고 실업급여는 184만원 받는 구조를 바꾸자는 것, 취업·실업을 반복하며 19~24번 실업급여를 타 먹는 구조를 바꾸자는 것, (고용보험기금이) 10조2000억원 흑자였다가 3조9000억원 적자 나는 구조가 된 걸 바꾸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년에게 주는 혜택, 청년에게 주는 기회를 뺏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윤석열 정부는 약자 복지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했다.

◇해명이 먹히지 않는 이유

복지만 보면 한국은 선진국과 까마득히 멀다. OECD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은 12.3%로 최하위 수준이다. 한국은 튀르키예(12.4%)보다 낮고, 코스타리카(12.3%)와 같다.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칠레(11.7%)와 멕시코(7.4%) 두 나라 뿐이다. 추정치이긴 하나 2022년 수치도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복지 선진국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2019년 기준 1위 프랑스는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이 30.7%, 2위 핀란드는 29.4%, 3위 덴마크는 28.4%에 이른다. 이웃 일본은 22.8%이며, 복지 시스템이 취약하다는 미국도 18.3%로 집계됐다. OECD 평균은 20.1%다.

이 마당에 ‘샤넬 선글라스’ ‘시럽(Syrup) 급여’ 같은 말을 하니까 절로 반감이 생긴다. 정부·여당만 한국을 대단한 복지 선진국으로 여기는 듯하다.

◇고용안전망은 더 넓혀야

실업급여는 대표적인 복지 정책이다. 누구든 일자리를 잃었을 때 숨을 돌리는 안식처 역할을 한다.

문재인 정부는 전국민 고용보험 정책을 추진했다. 2019년 가을 실업(구직)급여 지급기간을 최대 240일에서 270일로 늘리고, 지급 수준도 평균임금의 50%에서 60%로 높였다.

2020년 초 코로나 위기가 터지자 실업자가 급증했고, 실업급여 신청이 줄을 이었다. 같은 해 12월엔 전국민 고용보험 로드맵을 발표했다. 임금 근로자뿐 아니라 특수고용직(특고), 플랫폼 종사자, 자영업자 등 모든 취업자에게 2025년까지 고용보험을 적용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실업급여엔 돈이 든다. 문 정부는 2019년 고용보험료율을 1.3%에서 1.6%로 올렸다. 고용보험료는 고용주와 종업원이 반반씩 낸다. 그래도 고용보험 기금이 흔들리자 문 정부는 2021년 고용보험료율을 1.8%로 또 올렸다. 정부 재정 지원도 확대했다.

두 번씩이나 고용보험료율을 올리자 비판이 쏟아졌다. 문 정부가 좀 서둔 감은 있다. 그러나 고용안전망을 더 촘촘히, 더 두텁게 짜려는 시도 자체는 올바른 방향이다.

한국 노조는 전투적인 투쟁으로 유명하다.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일자리를 잃으면 곧바로 생계가 곤란해지는 구조에 있다. 직장을 잃어도 상당 기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서면 굳이 사생결단 투쟁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명장 켄 로치 감독은 2016년 칸 영화제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영화는 영국 복지 시스템과 관료주의의 맹점을 들췄다. 주인공 블레이크는 심장병이 악화돼 목수 일을 그만 둔다. 그는 복지센터에 질병수당, 구직수당을 신청하지만 번번히 자격 커트라인을 넘지 못한다. 컴퓨터를 못하는 블레이크는 자필로 이력서를 써서 공사장을 돌며 ‘구직활동’을 한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컴퓨터로 작성한 이력서도 없고, 구직사이트에 접속한 기록도 없다. 결국 구직수당이 끊긴다. 복지센터 직원은 식료품 무료 지원을 받겠느냐고 묻는다. 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살아온 블레이크는 수치심을 느낀다. 자존감이 상한 블레이크는 센터 외벽에 ‘I DANIEL BLAKE’라고 스프레이로 분노를 표시한다. 그를 지켜보던 이들이 박수치고 환호한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17일 실업급여 수급자의 도덕적 해이보다 퇴직자에 대한 회사의 허위 신고와 협박 등으로 실업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이 더 문제라며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이 단체는 "고용보험 상실 신고 코드를 회사만 입력할 수 있어서 회사가 권고사직과 직장 내 괴롭힘 등 ‘비자발적 퇴사’를 ‘자발적 퇴사’로 만드는 허위 신고가 판을 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복지 누수는 바로잡아야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쪽, 저쪽으로 편이 갈려 서로 말도 섞지 않는다. 그만큼 양극화가 심하다. 폭넓은 복지는 양쪽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고 했다. 일자리를 잃어도 한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한결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한국은 대표적인 저부담·저복지 국가다. GDP 대비 복지 지출을 적어도 OECD 평균인 20%까지는 부지런히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봤자 중부담·중복지 국가에 속할 뿐이다.

복지 누수를 바로잡겠다는 걸 누가 반대할까. 다만 주종(主從)이 뒤바뀌어서는 곤란한다. 어디까지나 주는 복지 확대다. 실업급여 혜택을 넓혀도 모자랄 판에 ‘샤넬·시럽’ 이야기가 나오니까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이다.

실업급여 개선 공청회를 국민의힘 노동개혁특위가 주관한 것도 부적절해 보인다. 고용노동부가 고용보험 주무부서인 건 알지만, 실업급여는 노동개혁이 아니라 복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약자 복지’가 현 정부의 원칙이라면 더욱 그렇다.

<경제칼럼니스트>

2023071801001047800051411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