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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료 인상은 민감한 정치 이슈가 됐다. 역대 정부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전기료 인상을 억누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전기료가 정치가 됐다. 전기는 대표적인 공공재다. 따라서 정부의 간섭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전기 회사가 적자 수렁에 빠졌다면? 더구나 그 회사가 증시 상장기업이라면? 투자자들로선 정부의 지나친 간섭에 뿔이 날 수밖에 없다.
한전은 지난해 32조원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역대 최악이다. 올해도 수조원 적자가 예상된다. 법이 정한 사채 발행 한도도 목까지 찼다. 이러다 한전이 이끌어가는 전력시장 생태계마저 흔들리까 걱정이다.
한전이 진 빚은 결국 국민이 갚아야 할 몫이다. 폭탄은 언젠가 터지게 돼 있다. 정치가 된 전기료, 뭐가 문제이고 해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 콩보다 싼 두부
2018년 7월 당시 김종갑 한국전력 사장은 페이스북에 ‘두부공장의 걱정거리’라는 글을 올렸다. "수입 콩값이 올라갈 때도 그만큼 두부값을 올리지 않았더니 이제는 두부값이 콩값보다 더 싸지게 됐다"는 것이다. 콩은 전기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연료, 두부는 전기를 말한다.
콩과 두부는 역대 한전 사장의 단골 레퍼토리다. 2008년 당시 김쌍수 사장은 "콩값이 올라가면 두부값도 오르는 것이다. 가스와 유가가 50~100% 올랐는데 전기요금은 동결돼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기요금은 선진국처럼 연료비 가격 변동을 반영해 조정하는 연동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종갑은 정통 관료, 김쌍수는 LG 부회장 출신이다. 관 출신이든 사기업 출신이든 전기료 책정에 문제가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셈이다.
◇ 정부는 넘사벽
정권이 바뀌면 전임 정부 정책은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힌다. 하지만 전기료 정책만은 일관성이 있다. 보수든 진보든 그저 꾹꾹 누른다. 겉으론 물가가 올랐다거나 서민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를 댄다. 속으론 선거를 겨냥한 포퓰리즘 성격이 짙다. 그 바람에 한전만 골병이 든다.
이명박 정부 시절 김쌍수 사장은 소액주주들한테 소송을 당했다. 전기요금을 원가보다 싸게 책정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에서다.
후임 김중겸 사장은 전기료 인상을 놓고 정부와 티격태격하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현대건설 사장 출신이지만 소용없었다. 한전은 2012년 전기료 두자릿수 인상을 지식경제부(현 산업부)에 요청했으나 두차례 반려당했다. 한전이 인상률을 4.9%로 낮춘 뒤에야 정부는 승인 도장을 찍었다.
박근혜 정부에선 주택용 전기료 누진제가 큰 이슈가 됐다. 요금폭탄 불만이 커지자 정부는 2016년 12월 누진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가구당 연평균 11.6%의 인하 효과가 예상된다고 홍보했다. 한전 입장에선 수익 감소다.
◇ 무늬만 연료비 연동제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책 때문에 전기료가 올랐다는 말이 나올까봐 노심초사했다. 되레 정부는 주택용 전기요금을 여름(7~8월)에 깎아주는 개편안을 2019년에 내놨다. 한전으로선 연간 3000억원 가까운 손실을 떠안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한전 이사회가 개편안에 제동을 걸었다. 이사들이 배임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진통 끝에 개편안은 이사회를 통과했으나 조건이 붙었다. 2020년 상반기까지 전기요금 개편안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그 개편안이 바로 2021년 1월부터 시행된 연료비 연동제다. 전기 생산에 쓰이는 액화천연가스(LNG), 석탄, 유류 등 연료비 변동분을 전기요금에 주기적으로 반영한다는 내용이다. 한전의 오랜 숙원이 풀리는 듯했다.
웬걸, 연동제는 디테일의 벽에 가로막혔다. 기름값이 단기간에 급등하면 정부는 요금 조정을 유보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한전이 아무리 아우성쳐도 정부가 ‘유보’하면 그만이다. 또 요금을 올리더라도 kWh당 직전 요금 대비 1회당 3원까지만 변동이 가능하게 했다. 정부는 유보 카드를 수시로 내밀었다. 동시에 한전은 적자 수렁에 빠졌고, 주가는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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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뛰면 정부는 전기료 등 공공요금부터 동결한다. 이런 관행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한전은 적자 수렁에 빠졌다. 사진=연합뉴스 |
보수 윤석열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전기료 인상을 단행하는 등 기세좋게 나갔다. 작년 6월 추경호 부총리는 "누적된 적자 요인이 워낙 심화하고 있어 (전기료를) 동결하기엔 회사(한전) 자체의 경영 존립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랬던 정부가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속에 국내 물가 역시 껑충 뛰었기 때문이다. 겨울철 난방비 폭탄을 다룬 뉴스가 줄줄이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월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올 상반기 공공요금 인상을 동결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3월 말 당정은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보류했다.
◇ 왜 자꾸 되풀이될까
한전은 1989년 국내 증시에 상장됐다. 이어 1994년 주식예탁증서가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됐다. 겉으로 봐선 민간기업이다.
그러나 속을 보면 다르다. 최대주주는 여전히 정부다. 산업은행이 32.9%, 기획재정부가 18.2%의 지분을 쥐고 있다. 둘을 합치면 51.1%로 절반이 넘는다. 자본주의에선 지분이 왕이다. 상장사 한전이 정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법원도 정부 권한을 인정한다. 2012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한전 소액주주들이 국가와 김쌍수 사장을 상대로 낸 10조원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지식경제부는 물가 등을 고려한 정책적 판단을 기초로 전기요금을 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전기요금을 원가 이하로 산정하더라도 법령을 위반했다거나 임무를 게을리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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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정부 110대 국정과제 중 전력망·시장 부분. 출처=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
◇ 해법은 뭔가
단기 해법은 애써 도입한 연료비 연동제를 원래 취지에 맞게 운영하는 것이다. 정부의 ‘유보’ 권한은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게 맞다.
근본 해법은 윤석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110대 국정과제에서 제시했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전력시장·요금 및 규제 거버넌스의 독립성·전문성을 강화하고 경쟁과 시장원칙에 기반한 전력시장을 구축한다."
전기료 변동을 심의하는 전기위원회에 독립성을 부여하고 전문성을 높이는 게 급선무다. 현재 전기위는 전기사업법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에 설치된다(53조). 위원장을 포함해 비상임위원 8인과 상임위원 1인(산업부 관료 겸임) 등 총 9명으로 구성된다. 위원장과 위원들은 장관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 또는 위촉한다. 산업부의 입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기위는 전기요금 심의만 할 뿐 인가권은 정부에 있다. 전기위의 판단을 정부가 함부로 거부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한전법은 "전력수급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1조)으로 명시한다. 회사가 튼튼해야 주어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물가 또는 선거 핑계를 대며 정부와 정치권이 자꾸 할 일을 미루면 언젠가 사달이 나게 마련이다.
한전 직원 또는 한전 투자자들을 위해 전기료를 정상화하자는 게 아니다. 에너지는 국가 대계다.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한전이 튼튼해야 우리나라 에너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미래형 전력망 구축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공룡 한전에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 전기료 인상으로 타격을 입을 에너지 취약 계층을 돌보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 다만 싼 전기료에 집착한 나머지 에너지 산업의 기초를 흔드는 어리석음은 피하자는 얘기다.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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