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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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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시마 사고가 남긴 ‘혼종 멧돼지’…생태계가 보내는 경고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6.02.16 06:18

인간이 떠난 방사능 오염지역에서
가축 돼지와 멧돼지의 유전적 혼합
혼종, 멧돼지와 역교배 계속하면서
가축 돼지 유전자는 점차 사라져
방사성 물질 확산 우려도 제기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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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31일 일본 후쿠시마 대피 구역에서 촬영된 가축 돼지와 멧돼지의 잡종으로 추정되는 개체들 사진.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자력 발전소 사고 직후에는 가축 돼지의 형태적 특징을 보이는 잡종들이 다수 관찰되었으나, 이후 몇 년 동안 그 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화살표는 털 색깔이 다양한 잡종으로 추정되는 개체들을 가리킨다. (자료=JOURNAL OF FOREST RESEARCH , 2026)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인간 사회를 넘어 지역 생태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주민 대피로 비워진 땅을 차지한 것은 야생동물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가축 돼지와 야생 멧돼지가 뒤섞인 '혼종(hybrid) 멧돼지'의 등장이었다. 이 현상의 발생 메커니즘과 생태적 의미를 분석한 연구 결과가 최근 국제 학술지에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연구는 히로사키대학교 방사선 비상 의학 연구소의 도노반 앤더슨 박사와 후쿠시마대학교 가네코 신고 교수 연구팀이 수행했다. 연구 결과는 '후쿠시마에서 재야생화된 돼지의 모계 혈통이 멧돼지 개체군 내 유전적 혼입 가속화에 기여하다'라는 제목으로 지난달 국제학술지 '산림 연구 저널(Journal of Forest Research)'에 게재됐다.




연구팀에 따르면 원전 사고 이후 대피 과정에서 사육 돼지들이 방치되거나 탈출했고, 이들은 농경지와 산림에서 빠르게 야생화됐다. 이후 기존에 서식하던 일본 토착 멧돼지와 자연 교배가 이뤄지며 유전적으로 혼합된 개체가 출현했다. 2015~2018년 사이 후쿠시마 일대에서 수집된 샘플을 분석한 결과, 상당수 멧돼지 개체에서 이미 가축 돼지의 유전자가 확인됐다.



◇가축 유전자는 왜 '빠르게 사라지는가'


가축 돼지와 야생 멧돼지는 모두 같은 종(Sus scrofa)으로, 아종 수준의 차이만 있을 뿐 자연적으로 교배가 가능하며 자손도 생식 능력을 가진다. 분류학적으로는 동일한 종이지만, 가축 돼지(Sus scrofa domesticus)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 번식력과 성장 속도 등이 강화된 집단이고, 야생 멧돼지(Sus scrofa leucomystax)는 자연 선택을 통해 생존과 적응력이 유지된 집단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선택 압력 아래 형성된 유전적 성격 때문에, 두 집단의 교배는 단순한 개체 교류를 넘어 생태적 의미를 갖는다.


이들을 '혼종'으로 부르는 이유는 종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형성된 유전 형질이 야생 개체군의 진화 경로와 개체군 동태를 교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가축의 유전적 특징이 빠르게 희석된다는 사실이다. 연구진은 그 핵심 원인으로 '번식 주기'를 지목했다. 야생 멧돼지는 보통 연 1회 번식하지만, 가축 돼지는 인위적 개량을 통해 연 2회 이상 번식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가축 돼지의 번식 특성은 혼종 개체에도 일부 전달됐고, 이로 인해 혼종들은 빠른 세대교체를 거치며 다시 야생 멧돼지와 반복적으로 역교배됐다.


그 결과, 세포 내에서 가축 돼지의 유전자는 급속히 줄어드는 반면, 멧돼지 유전자는 개체군 전체에 빠르게 재흡수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다만, 세포질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수정 시 난자에서만 전달되기 때문에, 가축 돼지 암컷에서 시작된 모계 혈통은 세대가 지나도 그대로 유지된다. 겉으로 보면 해당 개체는 '가축 모계 유전자(미토콘드리아)를 지닌 멧돼지"로 남는다.


이때 핵 유전자는 매 세대마다 부모 양쪽에서 재조합되므로, 혼종이 다시 야생 멧돼지와 반복적으로 교배할수록 가축 유래 핵 유전자는 빠르게 희석되고 멧돼지 유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커진다.


결국, 가축 돼지의 모계 혈통은 미토콘드리아 수준에서 '기록'처럼 남아 있지만, 실제 개체의 생리·형태·행동을 좌우하는 핵 유전체는 이미 대부분 멧돼지 쪽으로 대체됐다. 그래서 연구팀은 이를 “가축 모계 혈통이 오히려 핵 유전체의 빠른 멧돼지화(野生化)를 촉진했다"는 다소 역설적인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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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현 내 모든 멧돼지 표본의 분포 지도. 아이콘의 색상은 각 표본의 잡종화 정도를 나타낸다. (자료=JOURNAL OF FOREST RESEARCH , 2026)


◇유전자 외곽 확산이 방사능 확산으로 이어질까


이러한 유전적 혼합은 단순한 진화 현상을 넘어 심각한 생태계 관리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우선, 가축 유래의 높은 번식력이 유입되면서 후쿠시마 피난 구역 내 멧돼지 개체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실제로 사고 1년 뒤 약 6000마리 수준이던 포획 개체 수는 9년 만에 3만6000마리로 6배로 늘어났다.


더 우려되는 점은 방사성 물질의 확산 가능성이다. 혼종 멧돼지들은 방사성 세슘을 체내에 축적한 채 이동하며, 오염 지역과 비오염 지역을 잇는 '생물학적 매개체' 역할을 한다.


유전적 분석 결과, 원전 인근에 집중돼 있던 가축 유전자 분포가 점차 외곽으로 확산되는 경향이 확인됐는데, 이는 방사능 오염 확산 경로와 겹칠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유전자가 여러 세대에 걸쳐 외곽으로 확산된다는 사실만으로 방사능도 외곽으로 확산할 것으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논문에서도 이를 '가능성' 수준에서만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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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시마 현 나라하마치의 기차역 인근 철로가 잡초로 덮인 채 녹슬어 있다. 2015년 9월 4일에 찍은 사진으로, 나라하마치는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자 전역에 피난지시가 내려졌다. (사진=AP/연합뉴스)


◇재난이 남긴 '진화의 흔적'


연구팀은 가축 유전자의 비율 자체는 제한적일 수 있지만, 소규모 유전자 유입만으로도 토착종의 유전적 구조와 생태계 관리 체계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방사능 오염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개체 이동과 번식 패턴을 장기적으로 추적·관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연구는 원전 사고가 단순한 환경 오염을 넘어, 야생동물의 진화 경로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1986년 4월 방사능 오염 사고 있었던 구소련(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도 '배제구역' 내의 인간 활동이 중단되면서 늑대·멧돼지·사슴 등 대형 야생동물이 급증하고, 이들 개체에서 방사성 물질의 체내 축적이 관찰되기도 했다.


이 점에서는 후쿠시마와 마찬가지로 '인간 부재가 생태계를 빠르게 재편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체르노빌 사고 직후에는 가축이 대부분 도살·제거돼 숲으로 방치되지 않았고, 그 결과 가축과 야생동물 사이의 지속적인 교배나 유전적 혼입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체르노빌 연구의 초점 역시 가축 유전자 유입이 아니라, 방사선 노출에 따른 돌연변이율 증가나 생식·형태 이상 여부에 맞춰져 있었다.


반면 후쿠시마는 농경지와 축산 지역이 넓게 분포한 상태에서 대피가 단계적으로 이뤄지며 가축 방치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방사능 오염과 인간 부재, 가축 야생화가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적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 차이 때문에 후쿠시마에서는 체르노빌과 달리, 재난 이후의 관리 방식이 야생동물의 유전 구조와 진화 경로까지 바꾸는 사례가 나타났다.


인간이 초래한 재난이 자연 생태계에 어떤 '유전적 흔적'을 남기는지, 그리고 그 영향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앞으로의 관찰과 연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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