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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생활정치로 진화하는 ‘국민제안’…참여 민주주의 확대 평가 속 이념적 접근 비판도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8.20 12:49

국민제안, 민원·청원 등 4가지 창구로 운영…국민참여토론도



국민제안 vs 국민청원, 실명제 유무·비공개 등 차이점 뚜렷



전문가들 "국민제안, 불투명·폐쇄적·제한적…활성화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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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 국민제안 홈페이지.


[에너지경제신문 오세영·윤수현 기자] 청와대 국민청원에 이어 대통령실 국민제안 등 다양한 민원 제안의 창구가 생활정치로 진화하고 있다. 참여 민주주의가 확대된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국민 여론을 이념적으로 접근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난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졌던 청와대 국민청원은 윤석열 정부 들어 ‘국민제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통령실이 발표한 ‘국민제안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분기(1월 1일∼3월 31일)에 신청된 국민제안은 총 1만872건으로 집계됐다. 하루 평균 120여건, 한달 평균 3600여건의 민원이 제안되는 셈이다.

신청 분야별로는 행정·안전 분야(12.8%)가 가장 많고 △경찰·검찰·법원(11.7%) △재정(8.9%) △주택·건축(6.4%) △문화(6.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올해 1분기 국민제안의 주요 키워드는 피해자, 코로나, 경찰서, 중국, 부동산, 장애인, 일자리 등이다.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은 국민제안에 더해 국민참여토론도 열고 있다. 지금까지 △도서정가제 적용 예외 △TV수신료 징수방식 △집회·시위 요건 및 제재 강화를 안건으로 다뤘다. 대통령실은 네 번째 의제인 ‘배기량 중심 자동차 재산 기준 개선 방안’에 대한 국민참여토론을 21일까지 진행한다.

국민제안이 국민청원과 다른 점은 실명제를 도입하고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국민제안의 경우 실명 인증을 해야 민원내용을 작성할 수 있고, 타인이 작성한 글은 볼 수도 없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진보 정권과 보수 정권에서 국민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의 차이점이라고 분석했다. 진보 정권의 경우 각 이해관계자가 모여 논의하는 ‘숙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면 보수 정권의 경우 다양하게 뻗쳐진 의견보다는 정제된 의견을 듣는다는 특징이 있다는 점에서다.

또 진정 생활정치로 나아가고 참여 민주주의가 확대되려면 대통령실이 나서서 지금 국민제안이 지닌 폐쇄성과 부진한 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 국민제안, 민원·청원 등 4가지 창구로 운영…국민참여토론도


윤석열 정부의 ‘국민제안’은 △행정 처분에 대한 민원을 제출하는 민원·제안 코너 △공무원의 공무 집행에 시정을 요구하거나 법률·조례·명령·규칙 등에 대한 의견을 내는 청원 코너 △디지털 소외 계층을 위한 동영상 제안 코너 △문의사항을 접수하는 102 전화 안내 등 네 가지 창구로 운영된다.

지금까지 국민제안을 통해 정책화를 추진했거나 예정인 목록은 42가지다. 정책화가 이뤄지는 과제는 취약계층, 청년층, 육아·청소년, 공정, 안전, 생활불편해소 등의 분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취약계층을 위한 주요 정책은 △한부모가족 양육지원비 지급(만 18세까지)이 자녀의 고3 기간 중 중단되지 않도록 개선 △저소득층·맞벌이 가정 자녀 외 다자녀 가구·임산부의 자녀 등으로 초등학교 돌봄교실 우선 신청 자격 확대 검토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점자안내판에 출입구번호 표기 의무화 등이 있다.

청년층을 위한 주요 정책으로는 △청년 전용 모기지 신설 △생애최초·신혼부부 대출한도 확대 △청년 특별공급 신설 등 청년층 주거지원 확대 등을 내놨다.

육아·청소년을 위한 주요 정책은 △교복구입비 지원방식 변경 등을 통해 교복 공동구매 시 학부모 선택권 확대 △2019년 10월 이전 육아휴직 사용자도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 활용 △가정 여건에 따라 첫째 또는 둘째의 전액장학금 수혜 대상 가능 등을 추진했다.

공정을 위한 주요 정책으로는 △미용사 등 국가기술자격 실기시험 결과 공개 확대 △기업 채용공고시 근로조건·업무내용 등 정보의 구체적 공개 등을 바꿀 예정이다.

안전을 위한 주요 정책은 제1종 자동변속기 면허신설 등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 개선 등이 있다.

국민들의 생활불편해소를 위한 정책으로는 △소규모 임대사업자도 귀농 창업자금 지원대상 포함 △운전면허 시험장 토요일 운영 확대 △14세 미만 아동의 본인인증 절차 불편 해소 △소유자 본인에 한해 전자지갑으로 발급받는 전자 등기사항증명서 수수료 면제 등을 반영했다.

대통령실은 국민제안과 동시에 일정 기간 동안 댓글로 의견을 나누는 국민참여토론도 실시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도서정가제 적용 예외 △TV수신료 징수방식 △집회·시위 요건 및 제재 강화를 안건으로 한 국민참여토론을 논의한 바 있다.

TV수신료 징수방식 변경의 경우 일부 반대여론과 불편호소에도 전기요금과 TV수신료의 분리 징수를 강행했다. 또 전자책을 도서정가제 적용에서 예외로 해달라는 주장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을 당했다.


◇ 국민제안 vs 국민청원, 실명제 유무·비공개 등 차이점 뚜렷


청와대 국민청원과 대통령실 국민제안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국민청원에 익명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반면 국민제안은 ‘실명제’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이다. 국민제안은 100% 실명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매크로를 이용한 여론 왜곡을 방지할 수 있다. 외국인의 경우에는 외국인등록번호로 본인 실명을 인증해야 국민제안에 참여할 수 있다.

국민제안은 비공개이기 때문에 국민청원과는 달리 타인이 작성한 글을 볼 수 없다. 대통령실은 지난 정부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청원법상 비공개가 원칙인 내용을 공개해 국민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 이슈로 변질됐다고 판단, 비공개 원칙을 결정했다. 국민들이 제안한 내용 중 우수 안건을 모아둔 ‘국민제안 TOP10’ 페이지를 열람할 수는 있지만 내용 전체를 볼 수는 없다.

또 국민제한은 자유롭게 댓글을 쓸 수 있었던 국민청원과는 달리 특정 단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댓글은 제한하고 있다. 국민청원 운영 시절 혐오·차별 표현이 걸러지지 않았던 데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아이디를 이용해 편향된 분위기를 조성한 것을 막기 위해서다.

청원뿐 아니라 민원과 제안도 접수한다. 처리기한은 관련 법에 의거해 일반민원 14일, 고충민원 7일, 국민제안 1개월, 청원 90일 등으로 행정안전부와 국민권익위원회 소관이다.

국민제안은 국민청원과 달리 동영상과 녹음으로도 신청할 수 있다. 디지털 기기 사용에 불편을 겪는 경우 스마트폰으로 제안 내용을 촬영하고 국민제안 사이트에 업로드 할 수 있다.

국민청원과 국민제안은 활성화 면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국민제안은 지난해 6월 23일 시스템 개통 후 올해 3월 말까지 총 5만1686건의 제안이 신청됐다. 평균적으로 매월 5100여건, 매일 180여건의 제안이 신청된 셈이다. 하루 평균 31만명이 넘게 방문했던 국민청원과는 달리 이용률이 저조한 편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국민들의 정책 참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난해 5월 9일 종료됐다. 청와대에 따르면 그간 등록된 청원은 111만건, 누적 방문 5억1600만명, 누적 동의 2억3000만명에 달한다.

국민청원은 등록된 청원이 30일 내에 20만명 이상 동의를 얻으면 청와대에서 공식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운영됐다. 이 같은 요건을 충족한 청원은 286건이었다. 공개적으로 운영됐던 국민청원은 사회적 이슈를 공론화하면서 음주운전 처벌,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 소방공무원직 국가직 전환 등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 가운데 역대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텔레그램 n번방’ 관련 청원을 통해 정부가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에 나섰다. 실제로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 등 관련 법이 개정됐고 ‘아동청소년보호법’ ‘정보통신망법’ 개정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 전문가들 "국민제안, 불투명·폐쇄적·제한적…활성화 필요"


전문가들은 국민제안을 두고 민원내용이 비공개라는 점에서 투명성이 떨어지고 폐쇄적이라고 비판했다.

참여하는 국민들이 다른 민원내용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소통 창구가 될 수 없고 참여율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참여가 제한되다 보니 청와대 국민청원보다 인지도가 낮은 경향도 보인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대통령실 국민제안의 경우 국민들이 서로 어떤 제안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폐쇄적이고 실명제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의견 제안에 제한적이라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사회 모든 이해관계가 만족할 만한 정책은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안을 두고도 각각의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다른 의견을 제안하는 지를 서로 알아야 한다. 그게 바로 공감인 것이고 국민제안 제도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철현 경일대 교양학부 교수는 "실명제로 제안을 한다는 건 부담이 있기 때문에 참여자들이 의견을 제안하는데 있어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또 타인의 글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토론의 장으로 활성화되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청와대 국민청원의 경우 주제를 막론하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면서 방문자들도 관심을 갖고 토론을 나누는 과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의견을 수렴하기 보다 소통하는 홍보의 장으로 바뀐 경향이 보인다"고 비판했다.

국민참여토론의 경우 정부가 제도개선을 추진하려는 정책들 위주로 다뤄진다는 점에서 국민 여론을 수단화시킨다는 비판도 나왔다.

박 교수는 "정부가 취사 선택한 의제에 대해서만 토론이 이뤄진다면 진정한 국민 제안이 아닌 정부의 정책 밀어붙이기 명분에 그칠 뿐이다"라며 "국민 참여라는 제도를 부정적으로 수단화 시켜 국민 여론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숙의 민주주의가 능사는 아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국민 여론에 항상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며 "대통령실은 지금 국민제안 등이 지닌 미흡한 점이나 부진한 점을 개선해 토론의 장을 활성화 시키고 참여율을 높일 방법을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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