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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가천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과 교수 |
2001년 전력산업 구조개편 과정에서 전력산업기반기금(전력기금)이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한국전력 수행하던 전력사업 이외의 기능이 적지 않았다. 공익적 성격에서 단순 지원에 이르기까지 20여 개에 달했다. 구조개편 이후에도 전력산업에서 발생하는 공익적 기능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 한전의 ‘본업’인 전력사업과 관련이 없는 사업외적 비용을 합해 보니 대략 전기 판매수입의 4.6% 정도였고, 이것을 따로 분리해 조성한 것이 지금의 전력기금이다. 이미 구조개편을 시작한 미국 등에서도 공적기능이나 구조개편으로 인해 수반되는 비용조달을 위해 공공재부담금(Public Goods Charge) 또는 시스템편익부담금(System Benefit Charge)이라는 이름으로 조성해 운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성된 기금은 에너지절약, 기술개발, 재생에너지, 저소득지원 등 공익적 용도에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영국에서는 경쟁체제 도입으로 운영이 어려워진 노후전원의 퇴출비용 즉, 좌초비용(stranded cost)에 주로 사용됐다. 기금의 용도는 국가마다 구조개편 당시의 여건과 환경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전력기금 규모는 설치 당시 1조원에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기금부담율이 3.7%로 낮아졌음에도 2조 8000억원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또 그동안 미사용 누적분이나 자금회수 등으로 지난해에는 기금편성 규모가 6조 5000억원에 달했다. 앞으로 계획안을 보더라도 매년 4조∼5조원의 기금이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전기요금이 인상되면 기금규모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처럼 적지 않은 전력기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고민과 평가가 있었을 것이다. 매년 수조원에 달하는 기금이 조성되는 데도 여전히 쓸 곳은 많고, 기금을 필요로 하는 곳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기금 내역을 살펴보면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어떤 원칙과 기준에 의해 배분됐는 지도 도통 알아보기 어렵다. 전력기금 본래의 공적기능과 법적지원금은 물론, 여기저기 정책적 사업과 민원성 요구들이 쌓여가면서 수많은 사업들로 채워져 있다. 기금운영을 위해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겠지만, 이제는 기금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가장 먼저 짚어 볼 것은 기금의 중요한 설치목적인 공익성이다. 사실 어떤 것이 공익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공익성의 개념부터가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시대적 상황이나 산업여건에 따라 공익성이 바뀔 수 있다. 기금조성 초기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국가재정이 담당하거나 전력수요를 유발한 사업자 비용이 전가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아직도 제법 큰 부분을 차지하는 발전소 주변지역지원은 법적 근거 때문에 지원하지만, 온전히 공익으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발전 및 송전사업자의 비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농어촌 지원이나 전기안전지원도 마찬가지다. 이렇다보니 사업자가 당연히 해야할 일이나, 국가나 지자체의 기능에 해당하는 복지사업도 전력기금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전력기금이 생기면서 규모도 늘어나게 됐다. 지금은 대형 발전소 건설도 줄어들고 농어촌의 수요도 정체돼 단순지원금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앞으로 단순 지원이나 정치적, 민원성 지원은 줄이거나 재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다음으로 사업의 목적과 차별성 문제다. 기금 설계 당시에는 법적부담금, 연구개발, 수요관리, 신재생에너지 지원 등으로 분류체계와 구분이 비교적 명확했다. 연구개발비도 기술특성과 용도에 따라 체계적으로 구분해 관리했다. 그러나 근래들어 100여개에 달하는 사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이름만 봐서는 사업간의 차별성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또 기반이나 지원이란 명분으로 이런저런 지원센터, 기반구축과 같은 사업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고 있다. 난마처럼 어지럽게 걸쳐있는 사업들을 기준과 원칙에 맞춰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연구개발사업은 중복성도 심각하다. 국가가 관리하는 기금사업의 운영방식으로는 체계성과 시스템적 접근이 미흡해 보인다. 기금관리의 전문성과 객관성 확보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전력시장 도입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시장실패에 따른 보완장치가 미흡하다. 전력산업은 시장과 정책여건에 따라 시장실패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를 보완하는 것이 기금의 설치 목적중 하나다. 보급초기의 재생에너지나 분산전원, 에너지효율향상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특히 에너지효율향상은 고효율기기 설치나 효율기준으로 인해 발생하는 온실가스, 에너지절감, 전력설비 감소에 따른 편익이 설치자나 생산자에게 온전히 돌아가기 어렵다. 따라서 이를 합리적으로 보전해 주는 수단이 소위 ‘회피비용’이다. 전력기금 설치의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시장실패의 보완이라는 점을 인식하다면 앞으로 이런 부분에 보다 중점을 둬야 한다. 아울러 구조개편의 취지에 따라 규제체계의 변동으로 발생하는 매몰비용이나 좌초비용의 반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업자 의사와 관계없이 발전소 수명을 감축하거나 운전을 제한한다면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규제가 강화되면 비용을 수반한다. 따라서 사업자에게 상응하는 보상이 필요하고 이는 기금의 용도에 부합된다.
전력산업은 기본적으로 전기라는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고 유통하고 거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간접자본의 하나로 공익적인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에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전력기금이 여기저기 나누어주는 ‘쌈짓돈’이 돼서는 안된다. 전력기금은 전력산업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곳에 제대로 활용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