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화와 중동지역 분쟁 등 국내외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때 뉴스의 단골 메뉴였던 우리나라 가계부채 문제는 오히려 무대 한 켠으로 물러나 있는 듯하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약 2000조원으로, 이미 GDP 규모를 훌쩍 넘는다. 여기에다 약 1000조원으로 추산되는 전세보증금까지 부채로 인식할 경우 부채 총액은 3000조원으로 GDP 대비 160%에 육박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해외, 특히 미국에서는 가계부채가 주택구매뿐만 아니라 소비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용도로도 많이 활용된다. 전 인도 중앙은행 총재인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학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신용등급이 낮은 서브프라임 대출과 보유주택 담보대출(home equity loan)을 통한 소비증가가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소득격차 심화에 따른 무리한 대출 증가와 대출 부실이 주요 요인이었다는 분석이다. 현재 미국에서도 저소득 가계일수록 부채 비중이 크고, 반대로 고소득 가계는 금융자산 비중이 높고 부채는 거의 없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우리나라는 가계부채의 대부분은 주택을 취득하기 위한 것이다. 소비재원 마련을 위한 생계비 대출도 있지만, 소득이 낮을수록 신용도 역시 낮아져 실제로 소비재원을 마련을 위한 가계부채는 늘어나기 어렵다. 또한 가계부채 잔액중 약 300조원은 소상공인 대출이지만, 이는 주택담보대출 잔액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거시건전성 정책에 따라 주택담보대출에는 LTV, DTI, DSR 등이 적용돼 소득이 높을수록 대출 가능액도 늘어난다. 이로 인해 소득이 높은 가계일수록 대출 비중이 높아지고, 대출을 통해 취득한 자산 가격 상승으로 인한 처분수익 등으로 소득이 더욱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라구람 라잔의 주장과는 달리 대출이 소득불평등을 증가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적 특성과 대출 시스템의 차이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론적으로 가계는 경제에서 자금의 주요 공급원이다. 대부분의 가계는 미래에도 최소한 현재와 비슷한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번 날에는 밥을 다섯 끼를 먹고 돈을 적게 번 날에는 한 끼만 겨우 먹는 삶보다는, 일관되게 매일 세 끼를 먹으며 생계의 안정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안정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가계는 일시적으로 소득이 증가했을 때 이를 저축해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저축은 필요한 기업에게 자금으로 흘러 들어가 투자가 되고, 이는 경제 성장의 주요 동력이 된다. 실제로 이 원리는 과거 우리나라의 고도 성장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소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풍경은 크게 변했다. 기업들은 자금력 강화를 위해 현금을 유보하며, 이는 가계 저축에 적절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게 했다. 이에 대응해 정부는 가계 대출 규제를 완화했고, 결과적으로 저축된 자금은 주택 마련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가계는 자금의 공급자에서 수요자로서의 역할로 전환됐다. 과거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던 자금의 흐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가계는 부동산 취득을 위해 큰 자금이 필요하게 됐고, 유용한 자금은 마치 거대한 댐에 갇힌 물처럼 부동산 시장에 집중돼 그 수위만 점차 높아지고 있다. 가계부채의 증가와 부동산 시장 상승은 저축 등 가계가 선택할 수 있는 자산들의 수익률과 위험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 예금뿐만 아니라 적금 이자율도 점차 하락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초저금리 시대가 지속되며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이자율은 무이자 수준까지 떨어졌다. 또한 주식 IT 버블 등의 충격으로 주식시장은 가계의 안정적인 투자수단이 되기에는 부담이 크게 여겨졌다. 이에 가계는 은퇴 후 지속적 수익을 보장할 투자처를 모색했으며 답은 부동산 시장에 있었다. 가계대출 규제완화와 함께 가계의 부동산 투자 급증은 2006년부터 2007년에 걸쳐 부동산 상승기를 촉발했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잠시 주춤했던 시장은 2021년까지 다시 과열양상이 전개됐다.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한국 경제와 가계의 제한된 소득 증가율로 근로소득 대신 자본소득 증가에 더욱 집중하게 되면서 부동산 가격의 급등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하지만 소득 증가보다 더욱 빠르게 상승해버린 부동산 가격이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한 상황에서 부동산 취득을 위해서는 그만큼 부채를 증가시킬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가계부채 증가로 이어졌다. 이것이 현재 GDP 대비 세계 1위 수준의 가계부채를 지게된 배경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잠재성장률 1%대를 바라보는 가운데 소득대비 부동산가격 지수는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모두 빚으로 쌓은 것이니 가계부채와 침체위기에 빠진 부동산 시장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정책은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빚을 통한 자산의 축적을 지속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분배정의 측면에서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거시건전성 규제하에 부동산 취득을 위한 대출규모는 소득에 비례하므로 저소득 가계는 이미 부동산을 취득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다시 부채를 늘려 취득하도록 부추긴다면 그 끝이 어디일지 뻔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지금 높게 오른 부동산 가격만큼 깊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은 아닐지 두렵기만 하다.김수현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