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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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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한 휴 헤프너 누구? 성인잡지 ‘플레이보이’로 性혁명 이끌어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7.09.28 15:47

▲미국의 유명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창업자 휴 헤프너가 27일(현지시간)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사진은 미국 로스앤젤러스에 위치한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촬영한 헤프너의 생전 모습. (사진=AP/연합)


[에너지경제신문 한상희 기자] 미국의 유명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창업자 휴 헤프너가 27일(현지시간)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플레이보이를 발간하는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는 이날 성명에서 "헤프너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사인은 노환에 따른 ‘자연사’라고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는 밝혔다.

로이터통신은 그를 "획기적인 남성잡지로 1960년대 성 혁명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한때 그를 "대중 쾌락주의의 선지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헤프너가 27살이던 1953년 창간한 플레이보이는 과감한 여성 나체 사진을 다루면서 성인잡지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플레이보이의 토끼 모양 로고는 미국 성인문화의 국제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잡지의 성공으로 헤프너는 미국 미디어 업계의 거물이자 성인문화의 ‘아이콘’으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창간호의 표지 모델은 메릴린 먼로였다. 이어 샤론 스톤, 나오미 캠벨과 같은 스타들의 누드 사진이 표지를 장식했다.

커트 보니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등 당대 최고 작가들도 지면에 등장했다. 피엘 카스트로, 마틴 루서 킹, 말콤 X, 존 레넌 등 역사적인 인물과의 심층 인터뷰도 다뤘다.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헤프너는 대학 시절 앨프레드 킨제이가 출간한 ‘인간 남성의 성 행동’(일명 킨제이 보고서)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훗날 언론에 털어놓았다.

성적 위선과 억압에 대한 분노를 키운 그는 결혼 후 직접 포르노 영화를 제작하고 바람을 피우는 등 대담한 성생활을 이어갔다.

1953년 "도시 남자를 대상으로 가볍고 세련된 엔터테인먼트 잡지"를 만든다는 구상으로 가족과 친지로부터 끌어모은 자본금 8천 달러가 플레이보이 제국의 출발점이었다.

성장을 거듭하던 잡지는 1970년대에는 700만 이상의 독자를 거느린 사업체로 변신했고, 이를 모방해 선정성을 더 높인 잡지까지 등장했다.

21세기 들어 인터넷의 발달로 잡지 부수는 300만 이하로 떨어졌으나, 전 세계적으로 헤프너와 플레이보이라는 브랜드만큼은 여전히 남아있다. 플레이보이가 앞으로 여성의 누드 사진을 싣지 않겠다는 깜짝 선언을 한 2015년에는 발행 부수가 80만 부까지 떨어졌지만 이는 ‘맥심’에 이어 2위에 해당했다.

헤프너는 1964년 음란물을 발간, 유통한 외설죄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받고 풀려난 적 있다. 1985년에는 뇌졸중으로 일시적인 실어증과 부분 마비 증세를 겪었으나 완전히 회복했다.

2005년에는 케이블 TV 리얼리티 프로그램 ‘옆집 여자들’에 출연, 초호화 저택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동거녀 3명과의 삶을 공개하기도 했다.

같은 해 그는 사후에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된 먼로 옆에 묻히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60살 연하인 셋째 부인 크리스털 해리스와의 결혼으로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헤프너는 1992년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게 뭐냐는 질문에 "성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는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2002년 CNN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는 "나는 절대로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소년으로 머물면서 오래전 나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게 좋다"고 했다.

NYT는 이날 그의 부고 기사에서 "헤프너와 플레이보이 브랜드는 결코 떨어질 수 없으며, 둘 다 스스로를 성 혁명의 상징이자 미국의 사회적 편협함으로부터의 탈출구로 내세웠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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