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칸부(광주, 廣州)의 몰락을 "남해의 어둠 속에 빛나는 진주는 오랫동안 조용했다"라고 애도하였다. 8세기, 외국 상인이 모이는 도시 가운데 아랍인은 ‘칸푸’, 인도인은 ‘차이나’라 하던 광동보다 더 번창한 곳은 없었다. 현재 홍콩이 갖는 의미가 바로 당나라의 광주였다.
광주는 오랑캐들과 야생 짐승이 엉켜 살아가며 전염병이나 풍토병이 골치를 썩이던 곳이었다. 동시에 리치, 오렌지, 바나나, 반얀 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항구였다. 당나라 때 광주 인구 이십만 대부분이 ‘외국인’이었지만 진정으로 당나라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광주 전체는 남방 특유의 목재건물에 초가지붕, 한마디로 풀 더미였다. 기와지붕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강제할 때까지 처참한 화재가 반복하여 휩쓸었다. 항구에는 인도의 브라만, 페르시안, 말레이인 상선들이 가득 메웠다. 선박에서 부려놓은 향료, 마약, 보화로 산더미처럼 쌓였다. 외국인들은 향료나 약을 가져와서 비단이나 도자기로 교환하고자 했다. 당나라 상인들은 진귀한 외국 상품으로 부유해졌고, 통치자에게도 엄청난 뇌물을 쏟았다.
대부분 장사치나 다양한 외국인들이 광주에 정착했다. 당제국은 정부차원에서 편의를 위해 강의 남쪽에 숙소를 마련해 두었고, 체류 외국인들은 정부에서 지명한 장로(長老)의 지휘 하에 일종의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렸다. 인도 불교 신도들이 불교사원에서 푸른 연꽃(靑蓮)의 향을 뿌리며 예식을 거행하고, 그 옆에는 시아파 무슬림 교도들이 모여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관대한 당나라는 외국인의 종교를 법적인 보호하였다.
살인자, 해적, 타락한 관리의 약탈은 광주의 역사에 얼룩을 남겼다. 당나라의 관료가 권력을 이용해 상인의 화물을 약탈하려다 반대로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중앙정부도 초기에는 탐관오리 대신 공정한 관리를 파견했지만 뒤를 이어 부임 해 온 관리들은 아니었다. 탐관오리는 광주에 질서와 원칙을 만들어 내기 위한 당나라의 책략이라서다. ‘관료시장(官市)’이라는 악마적인 관료 승계방식을 통해 궁전에서는 사치품을, 정부는 수입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769년에 부임한 정직한 관리 이면(李勉)이 외국인 상인에게 벌금을 과하는 관리의 횡포를 막자 해외무역량이 열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탐관오리인 왕어(王鍔)는 세금뿐 아니라 사적인 세금을 징수하고 보물까지 착복하였다. 그 결과 그가 거두어드린 돈이 세금보다 많았다. 문제가 커지자 조정에서는 다시 청렴한 감독관을 파견한다. 당나라의 광주 경영정책은 먼저 청렴한 관리를 보내 일구고 다음으로 흡혈 탐관오리가 빨대를 꼽고 수확하는 방식이었다. ‘청렴’과 ‘탐관’이라는 두 유형의 관리가 왕조 내내 무한 반복하는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현종 황제가 총애하던 안녹산이 일으킨 난에 이어 더 치명적인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 그는 광주를 약탈하고, 외국 상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했다. 이 사태로 광주는 회복불능의 상태가 된다. 이후, 외국종교에 대한 대규모 박해까지 발생한다. 관용을 포기하자 중화민족주의자들은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청동불상들은 녹여 구리 동전으로 바뀌었다. 박해운동의 진정한 목적은 외국인 재산 몰수였다. 이런 종교를 빙자한 외국 문화혐오와 재산몰수는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홍콩에서는 수개월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150년간의 영국의 지배를 받아서인지 당나라 때 오랑캐처럼 홍콩인들 스스로 중국인이라 하지 않는다. 항구에 줄지어 선 은행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있다. 현재 캐리 람 행정장관이 비록 탐관오리는 아니지만, 북경의 관리시장에서는 빨대를 꼽겠다는 흡혈 관리들이 한창 경매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산당은 사치품을, 정부는 돈을 갈취하는 정책인 ‘청렴’과 ‘탐관’의 무한 반복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관대하지 않은 중국공산당은 안녹산과 황소 같이,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을 학살하여 재산을 갈취하고, 중화민족주의는 사찰의 불상과 교회의 십자가를 녹여 동전으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홍콩인들도 그런 역사를, 아픔을 알기에 계속 시위를 하고 있는 게다.
반복의 왕국, 중국의 역사는 이렇게 반복한다. 반성이 없는 역사라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