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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무책임한 누진제 개편안은 폐기해야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9.06.12 15:11

이덕환(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에교협 공동대표)


정부가 내놓은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무책임한 속빈 강정이다. 누진제 완화로 늘어나게 될 전력 수요 증가에 대한 분명한 대책도 없고, 누진제 완화의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대책도 없다. 현실적으로 폭염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견디기 어려운 겨울철 전기요금 폭탄에 대한 대책도 빠져있다. 엉터리 누진제 완화를 들고 나온 정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가구에 더 비싼 요금을 부과하는 누진제는 처음부터 합리적이고 공정한 제도가 아니다. 누진단계와 누진배율을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결정하는 방법도 없다. 그런데도 원전 덕분에 전력 사정이 넉넉한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누진제를 시행하고 있다. 누진제가 전력의 피크 수요를 관리하는 현실적으로 유일한 대책이기 때문이다.

누진제를 가정용에만 적용하는 것도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규모가 천차만별인 산업용·상업용의 경우에는 누진제 설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산업·상업용 전기의 소비 억제가 직접적으로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산업·상업용 전기요금은 제품의 원가에 반영되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떠넘겨진다. 업주가 개인의 주머니돈으로 전기요금을 내는 것이 아니다.

누진제를 완화하면 피크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필연이다. 우리의 전력 사정은 만만치 않다. 일시적으로 누진제를 완화했던 작년 7월 24일의 전력 수요는 역사상 최대인 92.48기가와트(GW)였다. 2017년 하계의 최대 수요 84.59GW보다 무려 10.9%나 늘어났다. 물론 작년 폭염이 기록적이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탈원전·탈석탄까지 고려하면 올해의 전력 수급 사정도 안심할 수는 없다. 자칫하면 누진제 완화로 몇 푼을 아끼려다 전력대란으로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누진제 개편에는 사회적 비용이 필요한 것도 필연이다. 누진제 완화에 필요한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구체적인 비용 부담 계획이 빠진 엉터리 개편안은 검토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더욱이 한전은 이미 적자의 늪으로 빠져 들고 있는 불량기업이다. 그런 한전에게 더 이상 덤터기를 씌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전은 국내외의 증권시장에도 상장되어 있는 민간상장기업이기도 하다. 지분이 조금 많다는 이유로 횡포를 부리는 산업부에 대한 국내 소액주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해외 주주들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전의 적자가 계속되면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평가에도 문제가 생긴다. 해외 영업에 차질이 생기고, 금융비용도 치솟게 된다. 결국 한전의 부실은 전력 수급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전기요금 폭탄은 여름철 폭염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겨울철 난방용 전력 수요도 엄청나다. 지난 20여 년 동안 겨울철 피크 수요는 여름철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이상 한파로 겨울철 피크 수요가 더 많았던 적도 많았다. 작년 겨울에도 피크 수요가 83.66GW를 기록했다. 전기 난방에만 의존하는 농촌의 노령 인구와 저소득층에게는 겨울철 전기요금 폭탄도 감당하기 어렵다.

정부의 개편안은 소비자들에게 오로지 자신에게 돌아올 상대적 혜택만을 근거로 이기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발전단가조차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합리적인 전기요금을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발상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누진제 철폐’(3안)를 선호하는 소비자가 많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제도까지 뒤섞어버린 땜질식 처방으로 누더기가 돼버린 전기요금 체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고 있는 뜻이다.

엉터리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무책임하고 허술한 개편안은 당장 폐기해야 한다.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전력수급 정책을 엉망으로 망쳐놓은 관료들에게는 언젠가 무거운 책임을 묻게 된다는 엄중한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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