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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고준위 핵폐기물 감추기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9.04.10 10:05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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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산업부는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 구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작년 11월 고준위방폐물관리계획 재검토준비단이 권고 보고서를 제출한 지 4개월이 지났다. 당시 정부는 월성 핵발전소 임시저장고 포화 시점 등을 이유로 1~2개월 이내에 재검토위원회가 출범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재검토위원회 출범은 계속 지연되었고, 결국 이제서야 재검토위원회 구성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5월 초나 되어야 재검토위원회가 출범할 것이다.

재검토위원회 출범 지연보다 더 큰 문제는 산업부의 계획 내용이다. 그간 산업부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계획’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산업부 보도자료에는 ‘사용후핵연료 관리계획’으로 용어가 바뀌었다. 재검토위원회 이름도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이다.

세간에서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이란 용어와 사용후핵연료라는 말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법률적으로 두 가지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사용후핵연료 가운데 원자력진흥위원회가 폐기하기로 결정한 것만 고준위방사성폐기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후핵연료를 폐기하기로 결정한 바 없다. 따라서 법률상 우리나라에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용후핵연료 폐기를 결정한 바 없기 때문에 파이로프로세싱 등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연구가 그동안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바꿔 이야기하면 지난 정부에서 상정했던 2053년 고준위핵폐기장 운영 계획도 필요 없는 것이 된다. 폐기할 계획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재 핵발전소 내부에 보관 중인 사용후핵연료를 관리할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향후 고준위핵폐기물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를 논의하려면 먼저 이 문제부터 풀고 시작해야 한다. 현행 방사성폐기물 관리법에서도 산업부 장관이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대한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2016년 7월 당시 박근혜 정부가 수립했던 계획도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계획’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는 이름부터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잡고 있다.

더 큰 쟁점은 재검토위원회 구성과 관련한 것이다. 이번 산업부의 발표에 따르면 15명으로 구성되는 재검토위원회 위원은 모두 학회의 추천을 받은 중립적인 인사들로 구성될 예정이다.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핵발전소 소재 지역, 환경단체, 원자력계의 제척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산업부는 밝혔다. 이는 과거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와 동일한 방식이다.

얼핏 보면 이 같은 방식이 중립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꿔말하면 핵심 쟁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당시 쟁점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위원들로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양측 주장에 대한 분량이나 시간을 맞추는 것 같은 기계적인 중립만 신경 쓰면서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비판이 계속 이어졌다.

고준위핵폐기물 관리정책 공론화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의제가 다뤄진다. 재검토준비단에서 공식적으로 다룬 의제만 27개에 이르며, 이 안에는 고준위핵폐기물 처분과 중간저장 여부, 부지선정 방식, 임시저장고 증설 같은 첨예한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중립적인 인사들과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는 방식의 재검토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으나, 이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재검토위원회가 파행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산업부의 행정편의주의적인 생각이 작용한 결과이다.

일부 찬핵론자는 고준위핵폐기물 문제가 수십 년간 해결되지 못한 것이 단지 지역주민들의 ‘훼방’이나 환경단체의 ‘선동’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이 복잡한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소수의 전문가들과 정부 관료들이 문제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종 미사여구와 검증되지 ㅇ낳은 설명을 갖고 일방적인 계획을 추진하다 계속 실패했던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하고 있는 이 ‘골치 덩어리’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를 더 드러내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론화는 이런 절차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 단지 ‘색안경 씌우기’라고 폄훼하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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