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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무 금융증권 에디터 |
[에너지경제신문=민병무 기자]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20대 초반, 박용래(1925∼1980)의 ‘저녁눈’을 처음 읽고 실망했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잔뜩 들어가야 값어치 있는 것으로 느껴지던 시절, 이렇게 단순한 시가 눈에 들어왔겠는가. "에계계, 이게 뭐야"라는 말이 툭 튀어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30대 들어서 겨울만 되면 붐비다 붐비다가 입속에서 웅얼댔다. 그리고 40대 넘어서는 붐비다 붐비다가 머리속에서도 웅얼댔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이 시는 더할 곳도 없고 뺄곳도 없는 명작이었다. 몸이 그것을 알고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시의 힘이다.
박용래는 은행원 출신이다. 광복 직전 강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특채로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에 들어갔다. 서울 본점에서 그가 맡은 첫 번째 일은 폐기처리해야 할 낡은 돈을 세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지폐계수기가 있지만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한장한장 넘겨야 했다. 역한 돈 냄새에 넌덜머리가 났다. 나중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현금 수송열차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무장한 보디가드들의 경호를 받으며 엄청난 현찰을 옮긴 이야기는 그의 단골 술안주였다. 하지만 ‘은행원 박용래’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사표를 던지고 나와 그후 교직의 길, 시인의 길을 걸었다.
한창 겨울인데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서울에서 눈구경 한게 언제 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말에도 반갑지 않은 미세먼지 소식만 들려왔다. 갑자기 박용래와 그의 시가 생각난 것은 마음에라도 흰눈이 펑펑 내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래서 추한 것을 모두 덮었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다.
새해가 보름이 지나지 않았는데 은행마다 난리다. 리딩뱅크를 놓고 혈전을 벌이고 있는 ‘빅2’는 싸늘한 눈총을 받고 있다. 신한금융은 신한은행장 등의 교체를 놓고 잡음이 일고 있다. 또 KB금융은 직원 평균연봉 9100만원 국민은행의 총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전직 은행장의 구속이다. 지난 10일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이 고위 공직자와 주요 고객의 자녀·친인척을 특혜 채용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도망 우려가 있다며 법정구속까지 시켰다.
"서류전형과 1차 면접 전형 당시 인사부장은 은행장에게 합격자 초안과 함께 청탁 대상 지원자들의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추천인 현황표’를 들고 갔다. 이 표에 이광구 은행장이 동그라미를 쳐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했다. 여기서 합격된 지원자는 새로운 조정작업이 이뤄져도 합격자 명단에서 빠지지 않도록 채용팀이 관리했다"고 재판부는 범행 수법까지 자세하게 명시했다. 기가 막힌 스킬에 할말이 없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묵직한 돌직구를 날렸다. "우리은행은 공공성이 다른 사기업보다 크다고 할 수 있고, 신입직원의 보수와 안정감을 볼 때 취업준비생들에게 선망의 직장이다"라며 "그에 걸맞은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하고 그 기본이 공정한 채용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어떤 조직보다 채용 공정성이 기대되었지만, 사회 유력자나 고위 임직원을 배경으로 둔 것이 새로운 스펙이 됐다"며 "지원자와 취준생들에게 좌절과 배신감을 주고, 우리 사회의 신뢰도 훼손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올해 창립 120주년이다. 대단한 역사다. 그리고 지난 11일 금융지주 체제를 4년만에 다시 부활했다. 14일엔 대대적 출범행사도 열린다. 축하할 일이다. 새출발을 하니 국민의 기대도 크다. 소박한 희망사항을 전달한다. 욕심내지 말고 ‘취준생에게 행복을 주는 은행’만 되어도 1등 은행의 감동을 줄 수 있다. 박용래가 다시 태어나 꼭 취업하고 싶은 은행만 되어도 1등의 자격은 충분하다. 늦은 저녁때 오는 포근한 눈발이 은행 밑에 붐비다. 이런 아름다운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