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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인공지능과 바둑 진흥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8.09.05 14:14

▲조훈현(국회의원, 프로기사 9단)


지금은 어디서나 언급되지만, 우리나라에서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2년반 전 이세돌 9단과 딥마인드 사의 인공지능 바둑 시스템이 겨룬 ‘알파고 챌린지매치’를 계기로 일반화되었다.

알파고의 도전을 받은 이세돌 9단은 "5-0, 어쩌면 4-1" 사전 예상을 내놓았고, 바둑계의 전문가들인 프로기사들도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했다. 필자 역시 같았다.

왜냐하면 바둑 실력이 빠르게 늘 수는 있지만, 높은 수준으로 갈수록 그 격차를 좁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계 정상권에서 한 점 차라면 같은 프로 9단끼리라도 어쩌면 평생 어쩔 수 없는 격차일 수 있는데, 행사 3달 전의 기력으로는 이세돌이 석 점 이상 앞선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알파고의 4-1 승리. 대국의 내용 역시 압도적이었다. 바둑의 세계에서 인공지능은 입신(入神, 최고수로 표현되는 9단의 별칭)의 천장을 뚫은 것이다. 딥마인드 사의 CEO인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는 "우리는 알파고를 달에 도착시켰다.(We landed it on the moon.)"며 기쁨을 만끽했다.

반면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악했다.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 최고수를 따라 잡으려면 최소한 십 년은 더 걸리지 않겠나 하는 생각들이 많았는데, 실상은 이미 승부가 났던 것이다.

필자도 그때 현장에 있었다. 충격을 받았다. 흡사 로마 제국이 무너지던 서기 476년의 어느 시점에 서서 그 장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바둑의 앞날이 걱정 됐다. 바둑은 둘 수 있는 착점이 많기 때문에 경우의 수를 거의 무한대로 보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수읽기를 통해 수련된 프로들의 감각을 인정하는 것인데, 인공지능은 진화한 학습 능력과 연산을 무기 삼아 일거에 이를 뒤집어 버렸다. ‘알파고 사건’ 이후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직종이 꼽히곤 했는데, 필자는 내심 프로기사를 우선 순위로 본다. 일단 추월이 확인된 이상 가장 대체하기 쉬운 분야로 바뀌는 게 아닐까.

이듬해 알파고는 세계 1위로 올라선 중국의 커제 9단을 상대로 바둑의 최고수는 인간이 아니라 인공지능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이제 프로기사들은 인공지능으로부터 수(手)를 배운다. 인터넷대국에서는 아마추어들이 다운로드한 인공지능을 써서 프로를 이기는 부정 사례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바둑업계는 대응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스포츠 세계에서 프로는 문전옥답(門前沃畓)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스포트라이트가 화려하게 비춰지는 핵심이다. 하여 특정 종목에서 프로라는 전문가 집단의 건재 여부는 그 분야의 성쇠를 나타내는 시금석이 된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시대. 지금 최선의 기술을 집적해 어떤 개체를 만든다면 시속 160km의 공을 던지고, 3할 넘는 타율을 내는 것 정도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팬들에게 이대호는 그래도 이대호고, 손흥민은 그래도 손흥민일 것이다. 왜냐면 이대호와 손흥민은 기량만이 아니라 그들의 캐릭터와 컨텐츠, 그리고 인격까지 결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팬들에게는 그들이 프로 선수이고, 대체 불가하다.

필자가 제1회 응씨배에서 우승한 때가 1989년 9월 5일이었다. 그 십여 년 이전부터 한국에서는 1위였고, 2002년까지는 세계대회 우승 기록이 있다. 20년 이상 정상권이었고, 그 이후로도 바둑 무대에서는 줄곧 주빈 자리가 돌아오곤 한다. 제자인 이창호도 비슷하고, 서봉수, 유창혁, 이세돌도 나름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판단하자면 필자를 포함한 이들은 한 마디로 운이 좋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프로로서 나를 만들고, 보여줄 수 있었으며 개성을 발현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프로기사들도 그러할 것인가. 인간의 기량을 추월한 인공지능은 그 여지를 많이 없앨 것임은 분명하다.

어떤 쪽이든 전문가 집단의 기반이 탄탄해야 그 분야의 발전이 있다. 올해 바둑 진흥법을 통과시키고 그 시행(2018. 10. 18)을 앞두고 있는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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