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 주 사바나 인근 주간 고속도로 26호선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가운데, 차량들이 빙판길이 된 도로를 힘겹게 운행하고 있다. (사진=AP/연합) |
[에너지경제신문 한상희 기자] 국제유가가 지난 6월 이후 급등세를 보이는 가운데 최근 미국 동부를 강타한 살인 한파에 천연가스 수요가 역대 최대치로 폭등하면서 가격도 치솟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겨울폭풍 ‘사이클론’이 북미 지역을 덮치며 천연가스 시장이 거세게 출렁였다. 새해 벽두를 강타한 역대급 한파는 천연가스의 수요와 공급, 재고 시장을 움직이는 세 가지 측면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가스전이 얼어붙는 등 공급 차질로 인해 실제적인 생산량이 감소한데다, 모든 미국인들이 난방을 풀가동하면서 수요 급증을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美 앨버타 주 천연가스 벤치마크 가격은 1000 큐빅피트 당 2.5달러에서 4.3달러로 72% 가량 폭등했고, 보스턴의 천연가스 가격은 지난달 MMBtu 당 25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는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되는 평균 가격이 3달러 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8배가 넘는 수준이다.
◇ 공급 차질: 기온 곤두박질 치며 가스전 얼어붙어
▲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 전경. 기록적인 한파에 폭포가 얼어붙었다. (사진=AP/연합) |
美 최대 셰일유·가스전 지대인 노스다코타 주의 바켄 지역은 추운 날씨로 인해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다. 로이터 집계 결과, 바켄의 가스 생산량은 이달 들어 20% 이상 감소했다. 미국 에너지 정보 업체 젠스케이프(Genscape)에 따르면, 노스다코타를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의 가스 유량은 지난달 25일 하루 13억 큐빅피트에서 이달 2일 10억 큐빅피트까지 떨어졌다.
BTU 애널리스틱스의 앤드류 브래드포드 애널리스트는 "파이프라인을 통과하는 물량이 줄어든 것을 두고 한파로 인해 주 내 소비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공급 문제와 아예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고 전했다. 하루 3억 큐빅피트를 한 지역에서 전부 소비한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이라는 게 브래드포드의 지적이다. 그보다는 이 지역 내 기온이 곤두박질치면서 공급차질을 빚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젠스케이프에 따르면, 노스다코타 주 외에 텍사스(-20%), 오클라호마(-22%), 펜실베니아(-5%) 역시 한파로 인해 공급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왜 한파는 가스에 공급 차질을 야기할까. 천연가스는 물과 수증기 동결에 영향을 받는다. 노스다코타 주의 기온이 영하 43도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얼어붙은 증기가 가스 생산에 차질을 야기했다고 보는 건 더이상 어불성설이 아니다.
캐나다에서도 한파로 인한 생산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파이낸셜 포스트는 앨버타 주의 천연가스전이 얼어붙어 생산을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업계 전문용어로 ‘프리즈-오프(freeze-off)’로 불리는 현상이다.
◇ 수요 역대 최대: (구조적)가스 발전소 늘리고 + (계절적) 날씨는 춥고
외신들은 기록적인 한파에 천연가스 수요가 역대 최대치에 달했다는 소식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천연가스 수요가 치솟은 이유는 추운 날씨에만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닉 커닝엄 오일프라이스 연구원은 "천연가스 수요 급증은 구조적 요인과 계절적 요인,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 봐야 한다"고 전했다.
커닝엄은 "최근 수년 간 미국은 저렴한 자국산 천연가스를 발전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규 가스화력발전소를 다수 건설했다"며 "이는 석탄을 줄이고 천연가스를 최대 발전원 지위에 올려놓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했다.
가스 소비가 계절 변화에 따라 변동성을 거듭하는 가운데, 높은 수요를 보이던 겨울은 더 높아지고 원래 낮게 유지되던 봄·가을의 소비도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구조적 증가는 시간이 지나도 이어질 것으로 커닝엄은 전망했다.
이같은 구조적 원인을 간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최근 천연가스 소비 급증세의 주 원인은 단연 극심한 한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새해 첫 날 미국에서 가장 많은 천연가스가 소비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의 천연가스 소비량은 143bcf를 기록했는데, 이는 2014년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공급이 중단되고 소비가 기록적인 수준으로 급증하는 상황에서 천연가스 가격은 왜 폭등하지 않는 걸까. 물론 일부 지역에선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다. 체감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며 펭귄 대피령이 내려진 캐나다 앨버타 주, 파이프라인이 동파된 미국 뉴잉글랜드 주 등이 대표적이다.
◇ 재고: 이달에만 ¼ 소진될 듯…타이트해지는 시장
▲2015년 10월∼2017년 10월 천연가스 재고. 천연가스 재고는 5년 평균수준 범위 안에서 움직였다. (단위= 10억 큐빅피트, 표=미 에너지정보청) |
수급 상황 뿐 아니라, 재고도 시장을 움직이는 중심축 중 하나다. 미 전역을 강타한 살인 한파는 지난 분기 쌓아 올린 천연가스 재고를 빠른 속도로 소진시키고 있다.
실제 미국 헤지펀드사 어게인 캐피털(Again Capital LLC )의 존 킬더프 파트너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이달에만 미국 천연가스 재고의 4분의 1 가량이 소진될 것으로 예측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의 천연가스 재고는 5년 평균 수준을 훨씬 웃돌며 공급과잉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급변했다. 지난 몇 달 사이 급격히 타이트해진 데다, 기록적인 한파가 재고를 더 빠른 속도로 소진시킬 것으로 전망됐다.
킬더프 파트너는 "모든 지표가 시장이 타이트해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며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영하 10도 안팎의 평균적인 겨울 기온을 회복하더라도 시장은 점차 타이트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수요를 목격하고 있다"며 "지난 주 기록한 사상 최고 수준의 천연가스 수요를 이번 주 경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한파는 일시적 요인… 시장 영향 제한적"
그러나 이같은 추세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뉴욕상업거래소 가격을 고려할 때, 천연가스 시장은 낙관적인 추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현재 천연가스 가격은 MMBtu(million British thermal units) 당 3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는데, 이는 지난해 평균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커닝엄 연구원은 "한파가 천연가스 가격을 급등시켰다며 야단법석이지만, 이번 기상이변이 천연가스 시장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한파에 따른 공급 차질이나 수요 폭등은 일시적 요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다시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상황은 금세 정상화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천연가스가 충분한 재고를 확보하고 있는데다, 향후 증산 추세를 이어갈 것이란 점도 우려를 더는 이유 중 하나다. 대부분의 애널리스트들은 천연가스 산업이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S&P 글로벌 플래츠의 테리 비스와나츠 애널리스트는 "천연가스 가격은 기록적인 한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여왔다"면서 "지난 하반기 생산량의 급증세가 올 겨울 공급부족에 대한 우려를 제한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