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한 쇼핑몰에서 한 남성이 전기차를 충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AP/연합) |
[에너지경제신문 한상희 기자] 막대한 자금과 정부 지원을 앞세워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한 중국의 전기차 시장이 심상치 않다. 무조건적인 성장 일변도 정책을 폈던 중국이 방향을 바꿔 부실기업 솎아내기에 나섰다는 평가다.
중국 정부는 내후년부터 3만 대 이상 생산 기업에 전기차를 일정 비율 이상 생산토록 강제하고, 2020년까지 전기차 보조금을 단계적으로 폐지할 계획이다. 가뜩이나 현지 기업 우대 정책을 펴는 중국에서 친환경차를 의무적으로 생산해야 하는 비율이 늘고 보조금마저 사라지면서 글로벌 완성차 기업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인식이 나온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시장이 확대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며 시장 선점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 의무생산제도로 수천 억 원 손실 발생 전망도
▲내년 시행 예정인 중국 전기차 의무판매제도. 현대차는 내년 중국에서 시행될 전기차의무판매제도를 감안하면 현지에서 9만 대 가량의 친환경차를 생산해야 할 것으로 추산된다. (표=블룸버그) |
2019년부터 시행 예정인 중국의 전기차 의무생산제도를 충족하려면 완성차 기업들은 2020년까지 연간 200만대를 생산해야 한다.
중국 공업정보화부(공신부)는 지난 9월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에서 "자동차업체들이 2019년 최소 10%, 2020년 12%의 신재생에너지자동차(NEV) 판매 비중을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심각한 오염 문제 해결에 사활을 걸고 있는 중국 정부는 애초 내년부터 전기차 등 친환경차 의무판매제를 실시할 계획이었다. 내년 8%를 시작으로 매년 2%씩 판매 비중을 높일 방침이었다. 하지만 국내·외 완성차업체는 "너무 촉박하다"며 유예를 요구했다.
콴렌오토인베스트먼트의 차오 허 회장은 "자국 자동차 업체들이 충분한 준비시간을 갖도록 하려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고려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친환경차 의무판매제를 적용받는 대상은 연간 5만 대 생산기업에서 3만 대 생산기업으로 확대됐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동차업체는 탄소배출권을 구입하거나 벌금을 내야 한다.
전문가들은 BYD나 테슬라 등 극소수의 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완성차 기업들이 상당히 힘든 싸움에 마주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친환경차 생산 판매 비중을 확대하더라도 전통내연기관 차량 대비 수익성이 높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SUV 차량 중심으로 성장해 온 중국 현지기업 창청(長城)기차(Great Wall Motors)가 의무생산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전망이다. 창청기차 외에 수백 수천 개의 기업들이 전기차 크레디트를 맞추지 못해 손실을 입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미국계 자산운용사인 얼라이언스번스틴자산운용(AB자산운용)의 로빈 주 애널리스트는 "의무생산제에 따른 비용이 수십억 위안(한화 수천억 원)에 달할 수 있다"고 추산하며 "중국 자동차업계 4위인 충칭(重慶)의 창안(長安)자동차(Chongqing Changan Automobile Co.)는 전기차 생산은 늘리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중국 전기차 시장을 선도하는 내수기업 BYD(BYD Co.)와 지리자동차(Geely Automobile Holdings Ltd.)는 전기차 의무생산제로 상당한 수혜를 입을 전망이다. 이미 전기차 생산 판매 비중이 높은 두 기업은 아직 전기차 비중이 크지 않은 다른 기업들에 크레디트를 판매하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례로 테슬라는 재정 손실분을 미국 내 크레디트 매출로 메우고 있다. 그러나 BYD와 지리자동차 역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정부 보조금 축소폭이 늘어나고 소비자 수요가 둔화되면, 당장 내년부터 실적에 직격탄을 가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기 때문이다.
◇ 식어가는 中전기차 열풍?
▲(자료=에너지경제신문DB) |
올 들어 상업용 신에너지차 판매량은 급감했다. 중국 당국이 전기차 보조금을 20% 삭감하면서 지난해 말 판매량이 급증한 후 뚝 떨어진 탓이다. 2020년까지 전기차 판매 보조금은 전면 폐지된다. 정부 예산으로 지급되는 보조금 대신 자동차업체들이 친환경차 판매를 늘리도록 강제하는 셈이다.
물론 국내 기업을 둘러싼 상황도 좋지만은 않다. 당장 2019년부터 친환경차를 9만대를 생산해야 하는 상황에서, 현재 현대·기아차가 중국에서 판매 중인 친환경차는 전기차인 ‘위에동EV’가 유일하다. 현대차는 내년 2월말 중국 북경 2공장에서 쏘나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PHEV)를 생산할 예정이다. 애초 계획했던 올해 4월 중순보다 10개월이나 늦춰진 것이다. 기아차는 염성 3공장에서 8월부터 생산하려 했던 K5 PHEV를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PHEV 출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은 현지 정부가 LG화학·삼성SDI 등 한국업체가 생산한 국내산 배터리 적용 차량에 보조금 지급을 배제하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앞서 현대차는 올해 5월 중국에서 판매할 예정이던 쏘나타 PHEV의 배터리를 LG화학 제품에서 현지 업체인 ‘CALT’가 생산한 제품으로 바꿨다. K5 역시 쏘나타와 차체, 부품 등을 공유하는 만큼 PHEV의 주요 부품 중 하나인 배터리에서 같은 문제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과 13일 잇달아 시진핑 국가주석과 리커창 총리를 만나 사드 보복 철회를 요구하고, 전기차 배터리 관련 한국 기업의 애로 사항을 전달하면서 차츰 나아질 기미를 보이고 있긴 하나, 문제 해결이 단기간내에 이뤄지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 현대차, ‘옥석가리기’ 기회
▲현대차 아이오닉 일렉트릭(사진=현대자동차) |
아울러 현대차와 기아차는 내년 중국에서 시행될 전기차의무판매제도를 감안하면 현지에서 각각 9만 대, 5만 대 가량의 친환경차를 생산해야 할 것으로 추산된다. 두 회사가 현재 중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친환경차는 전무한 수준이어서 강화된 규제를 충족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비롯해 글로벌 완성차회사들은 강화된 규제에 맞춰 현지에서 전기차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가격경쟁력이 있는 전기차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글로벌 완성차회사의 전략으로 전기차 합자법인 설립과 전기차회사 지분투자 등을 업계는 꼽고 있다.
중국자동차제조업협회(CAAM)의 쉬 하이동 부사무총장은 "시장은 늘 적자생존에 따라 움직인다"며 "다 똑같은 값싼 차량을 생산하는 업체는 걸러지고 성과가 훌륭한 기업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업계 전문가 역시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중국 전기차 시장에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며 "이 과정에서 일부 경쟁력 없는 기업들은 도태되고 살아남은 기업들의 경쟁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나아가 "자동차 동력원의 전기화는 장기적으로 진행될 변화이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의 전기차 생산, 개발 계획 등을 고려할 때 전기차 시장의 중장기 성장 추세는 유효할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중국 정부가 BYD 등 현지업체에 많은 이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장해 요인이 있긴 하나,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전기차 시장인 중국의 의무생산제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어 "기업들 입장에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가운데 경쟁력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전기차 판매가 미미한 상황에서 국내 자동차업계의 우려가 크긴 하나, 무조건 악재로만 볼 수 없다. 오히려 거대 시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