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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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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산업안전, 근로자 책임도 강화해야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2.06.21 10:12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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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산업재해 예방은 모든 계층과 부서의 책임이다." 산업안전보건 국제기준에 해당하는 국제노동기구(ILO) 가이드라인에서 강조하는 사항이다. "조직의 각 계층의 근로자들은 자신이 컨트롤하는 안전보건관리시스템 부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산업안전보건의 또 다른 국제기준인 ISO 45001에서 역설하는 문구이다.

이들 국제기준이 전하고자 하는 말은 근로자는 보호 대상이자 책임주체라는 것이다. 근로자가 산업재해 예방의 중요한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근로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 아니라 산업재해 예방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근로자 스스로와 다른 근로자를 산업재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선 근로자의 역할과 책임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정부는 근로자를 단순히 보호 대상이라고만 여기면서 근로자의 권리만을 강조했을 뿐 책임의 일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외면해 왔다. 아니 근로자의 위상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부족했던 것 같다.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부개정하면서 부족하게나마 있던 근로자 의무의 핵심내용을 없앤 정부가 아니었던가. 근로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정부의 잘못된 인식이 강성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 노조원의 중요하거나 반복적인 안전수칙 위반에 대해서조차 어떠한 징계도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장해 왔다.

지난 정부에서 나온 어느 산업재해 예방대책에서도 근로자의 권리 외에 책임을 실질적으로 강조하는 문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근로자의 권리도 종전부터 당연히 인정되던 것을 새롭게 창설된 권리인 양 사실을 호도했다. 정부의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철학의 빈곤이 초래하는 폐해는 근로자의 역할과 책임을 둘러싸고도 산업현장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경영책임자 한 사람의 책임만 규정할 뿐 다른 주체의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규정하고 있지 않은 원맨(one-man)법이 되고 만 것도 정부의 산업안전 기초원리에 대한 철학의 빈곤 탓이다. 산업재해 예방에서 최고경영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건 불문가지의 사실이지만, 경영책임자 한 사람의 역할만 강제하는 것은 도무지 안전원리에 맞지 않는다. 경영책임자와 관리감독자를 포함한 근로자를 분절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산업안전보건에서 근로자를 대상화·수동화하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법이 된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은 근로자의 의무 위반에 대해 과태료만을 규정하고 있다. 이마저도 지난 정부에선 근로자 의무 위반에 대한 단속이 사실상 없어 과태료 부과 실적이 미미했다. 반면에 산재예방선진국으로 손꼽히는 영국·독일·일본은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근로자의 의무 위반을 과태료가 아닌 형사처벌 대상으로만 규정하거나, 중한 위반에 한정하여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형사처벌을 한다는 것은 근로자의 의무 위반을 범죄로 여길 만큼 중요한 문제로 취급한다는 이야기이다.

근로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철학의 빈곤은 근로자의 일부인 관리감독자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안전보건에서 ‘라인’ 중심의 관리(line management)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국제기준이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안전보건부서’ 중심의 안전을 되뇌고 있다. 이것이 현장의 안전보건을 뒤틀리게 하고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이 산업현장과 전문가의 공통된 인식이다. 정부는 안전보건부서의 확대를 안전역량 강화로 착각하고 기업에 연신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안전보건의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정부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도 하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건 정부와 사이비 전문가뿐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 관리감독자를 포함한 근로자의 책임은 보이지 않고 경영책임자의 책임만 오롯이 보이는 갈라파고스법이 되고 만 것도 안전철학 없는 아마추어행정이 불러온 측면이 크다. 산업안전보건 영역에서 행정부가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면 전문성에 기초한 철학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근로자를 산업재해 예방의 책임주체로 끌어내기는커녕 산업재해로부터 근로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일마저 멀어져만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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