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까지 이어지는 ‘폭염·폭우 복합재해’…‘여름 석달 대응’은 부족

지난 12일 서울은 낮 최고기온이 30.1℃까지 치솟았다. 1907년 근대 기상이 시작된 이래 10월 기온으로는 가장 높은 기록(공동기록)을 세웠다. 13일에는 전북 고창이나 경북 문경 등지에 70~90㎜의 많은 비가 쏟아졌다. 10월 중순임에도 폭염과 폭우를 걱정하게 하는 상황이다. 기후변화로 폭염과 폭우가 각각 발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두 현상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복합재해(Compound Events)'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여름철에 집중됐던 위험이 장마전선의 북상과 대기·해양 순환의 변화에 따라 늦여름과 가을까지 확장되고 있다. 최근 발표된 두 편의 연구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폭염·폭우 위험이 언제, 어디서, 어떤 메커니즘으로 달라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 폭염·폭우 복합재해, 발생 빈도 늘고 가을까지 확장 경희대 지리학과·기후사회과학융합학과 김지현 교수 연구팀은 지난달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발표한 논문에서 한반도의 폭염·폭우 복합재해 변화를 분석했다. 한국환경연구원의 성경민(제1저자)·채여라 박사와 프린스턴대 김태림 연구원이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연구팀은 1986~2025년 기상청 관측소 57곳의 지상 관측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폭염과 극한 강수가 결합하는 복합재해의 위험이 커지는 데는 개별 재해의 강도 변화뿐 아니라 발생 빈도의 증가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복합재해 위험이 기존의 6~8월 여름철에 머물지 않고 9월 이후 가을철로 확장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2024년 가을철 복합재해 발생일수의 표준화 편차는 7.29로, 과거 평균에서 크게 벗어난 극단적인 값을 기록했다. 표준화 편차는 관측값이 장기 평균에서 표준편차 몇 배만큼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7.29라는 값은 통상적인 연도별 변동 범위를 크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다만 이 수치만으로 발생 확률을 정확하게 산정하거나 기후변화의 인과관계를 단독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별 위험 양상도 달랐다. 서해안은 복합재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고빈도 노출 지역으로, 남동부 내륙은 발생 빈도와 별개로 한 번의 재해가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지역으로 구분됐다. 전국에 동일한 방재 대책을 적용하기보다 지역별 재해 특성에 맞춘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이러한 가을철 위험 증가의 대기 순환 배경으로 북서태평양과 일본 부근의 고기압성 순환 이상을 제시했다. 고기압 가장자리를 따라 중국 남동부와 동중국해에서 황해를 거쳐 한반도로 고온다습한 공기가 유입되면 높은 기온과 많은 수증기가 함께 공급될 수 있다. 이 같은 조건은 늦여름과 가을에도 폭염과 집중호우가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복합재해가 위험한 이유는 피해가 단순히 더해지는 데 그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폭염으로 지친 사람과 열에 노출된 노동자는 뒤이은 폭우에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 농작물은 고온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침수 피해까지 겪을 수 있고, 전력·교통·배수시설도 서로 다른 유형의 재난에 연이어 노출된다. ◇ 9월 장마전선 중심축 약 213㎞ 북상 복합재해가 가을까지 확장되는 배경을 이해하려면 동아시아 장마전선의 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기후센터(APCC)의 문수연·김옥연 박사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김형준 교수 연구팀은 최근 국제학술지 'npj 기후 및 대기과학(npj Climate and Atmospheric Science)'에 발표한 논문에서 동아시아 여름철 전선의 장기적인 위치 변화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1979~2025년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의 ERA5 재분석자료를 활용해 전선의 위치를 추적했다. 분석 결과, 특히 9월 10~30일 전선의 중심 위치가 과거보다 북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북상 폭은 위도 약 1.92도, 거리로 환산하면 약 213㎞에 달했다. 이는 여름철 후반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전선성 강수와 고온다습한 공기의 영향이 과거와 다른 지역과 시기에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선은 성질이 다른 공기 덩어리가 만나는 경계다.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전선을 따라 유입되면 공기가 상승하면서 구름이 발달하고 강수가 집중될 수 있다. 동시에 전선 주변의 고온다습한 공기는 인체의 열 방출을 어렵게 해 열 스트레스를 키운다. 연구에서 활용한 습구 글로브온도(WBGT)는 기온뿐 아니라 습도와 복사열, 바람 등의 영향을 반영해 사람이 체감하는 열 부담을 평가하는 지표다. 기온이 같더라도 습도가 높으면 땀의 증발을 통한 체열 방출이 어려워져 열 스트레스가 커질 수 있다. 연구진은 전선의 위치 변화에 따라 열 스트레스와 전선성 강수가 동시에 나타날 위험이 커지는 양상을 분석했다. 다만 전선의 북상만으로 모든 지역의 폭염·폭우가 증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 피해는 북서태평양고기압의 위치와 강도, 수증기 공급, 대기 순환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방재 체계에도 중요한 과제를 던진다. 여름철 집중호우와 폭염에 맞춰 설계된 대응 체계가 9월 이후에도 충분히 작동할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계절별 재난 대응 기간을 고정하기보다 관측과 예측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폭염과 호우가 연이어 발생하는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 '여름철 3개월 방재'에서 벗어나야 두 연구의 결과를 종합하면 동아시아의 기후위기는 단순히 여름철 기온이 오르고 비가 많이 내리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폭염과 폭우가 결합하는 시기가 달라지고, 장마전선의 위치가 이동하는 만큼 대응 전략의 재설계가 필요한 상황이다. 우선 방재 기간을 6~8월에 한정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9월 이후에도 폭염과 집중호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기상 관측과 예보를 바탕으로 방재 인력과 시설 운영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폭염 대응과 집중호우 대응을 따로 계획하는 방식도 개선해야 한다. 고온에 노출된 노동자와 취약계층, 침수 위험에 놓인 농경지와 도시 기반시설을 복합재해 관점에서 관리해야 한다. 지역별 대책도 달라져야 한다. 반복적인 재해 노출이 문제인 서해안에서는 예·경보와 상시 대응 역량을 강화하고, 단기간에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남동부 내륙에서는 급격한 기상 변화에 대비한 대피·복구 체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위험도와 대책은 지역별 관측자료와 재해 특성을 토대로 검증해야 한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온난화로 열린 지름길 북극항로…친환경 연료가 ‘필수’

지구 온난화로 북극해의 빙하가 빠르게 녹아내리면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최단 해상 수송로인 '북극항로(북동항로)'가 글로벌 물류 시장의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기존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는 항로(약 2만㎞)에 비해 부산~로테르담(네덜란드) 운항 거리가 약 1만 5000㎞로 25%가량 단축되고 운항 소요 시간도 30일에서 20일 안팎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맨의 후티 반군이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봉쇄할 경우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모든 상품 물류가 마비될 수도 있는 최근 상황까지 고려하면 북극항로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에 한국 정부는 북극항로 개척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고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지난 8월 22일 부산신항에서 출항한 국내 선사 팬스타라인닷컴의 '팬스타 아크로호'가 국내 컨테이너선 최초로 북극항로 시범 운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팬스타 아크로호는 북극해 구간을 통과한 뒤 출항 22일 만인 지난달 13일 목적지인 로테르담항에 성공적으로 입항했다. 이수호 해양수산부 북극항로추진본부장은 지난 8월 기자 브리핑을 통해 “이번 시범 운항을 통해 기존 항로 대비 운항 거리와 소요 기간, 연료 소모량, 운항 비용 등을 정밀 분석해 북동항로의 상업적 경제성에 관한 실측 데이터를 확보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지난 1월 당시 김성범 해양수산부 장관 직무대행도 기자간담회에서 “2026년 시범 운항을 시작으로 극지 항해 선박 건조를 지원해 2030년까지 정기 상업 항로를 개통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블랙카본'에 가려진 기후 재앙… 극지방 기름 유출 우려도 심각 그러나 북극항로의 활용 확대가 가져올 경제적 혜택 뒤편에는 심각한 환경적·안전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선박에서 배출되는 미세 탄소 입자인 '블랙카본(Black Carbon, BC)'이 북극의 눈과 얼음 위에 쌓이면 태양광 반사율(알베도)을 낮춰 빙하 녹음과 지역 온난화를 가속하는 심각한 기후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칭화대학교 환경대학·탄소중립연구원 연구팀은 지난 8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 지속가능성 (Nature Sustainability)'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2050년 북극항로 운항을 통해 연간 23억 달러의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지만, 선박 배출 블랙카본은 연간 2200톤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화석연료 기반 운항이 지속될 경우 경제적 이득 10억 달러당 북극 지역 온도가 0.002~0.002.9℃ 상승하는 기후 파급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선박 배출가스가 극지방 구름 구조를 변형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스위스 로잔 연방 공과대학교(EPFL) 극지환경연구소 연구팀은 최근 국제 학술지 '환경 연구 회보(Environmental Research Letters)'에 게재한 논문에서는 “단 한 척의 선박이 배출한 미세입자 오염물질조차 국지적 구름 방사열 구조를 변화시켜 구름이 열을 가두는 효과를 최대 22%까지 증가시킨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극한의 저온과 유빙, 위성항법장치(GPS) 작동 불능 환경에서 선박 사고가 발생할 경우, 해양 기름 유출(Oil Spill) 사고로 이어져 방파제나 오염 회수 인프라가 전혀 없는 북극 해양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힐 위험도 지적된다. 알리안츠의 해상위험 컨설팅 글로벌 총괄 라울 칸나는 지난 8월 10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10년간 북극권에서 발생한 500여 건의 선박 사고 중 절반 이상이 기계 피해 및 고장 때문이었다"며 “구조와 수리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극지방에서는 작은 기계 고장이나 좌초 사고도 대규모 해양 오염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IMO 중유 금지 규제… 무배출·저탄소 '친환경 연료' 전환 필수 이 같은 대기·해양 오염 우려에 대응해 국제해사기구(IMO)는 북극해 역내에서 벙커C유 등 중유(HFO)의 사용 및 운송을 전면 금지하는 규제를 2024년 7월 시행했다. 이에 따라 북극항로를 운항하는 선박은 액화천연가스(LNG),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 바이오연료 등 탄소 및 미세먼지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친환경 대체 연료를 사용해야 한다. 팬스타 아크로호 역시 이번 운항에서 선박용 경유인 MGO(Marine Gas Oil)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벙커C보다 오염물질 배출이 적다. 부산광역시는 지난달 5일 발표를 통해 “IMO의 북극해 중유 금정 규제에 맞춰 친환경 연료를 사용하는 시범 운항 선박 팬스타 아크로호에 3억 원의 연료비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면서 “향후 연간 5억 원 규모로 확대해 친환경 벙커링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친환경 연료로의 빠른 전환만이 북극항로의 경제성과 환경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칭화대 연구팀은 '네이처 지속가능성'에 발표한 논문에서 “수소 및 e-연료(전자연료) 등 무배출 대체 연료로 빠르게 전환할 경우, 물동량이 늘어나도 블랙카본 배출량은 감소하는 '탈동조화(Decoupling)' 현상이 도달해 환경과 경제가 상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연료 전환의 단계적 경로를 제시한 연구도 주목받고 있다. 중국 구이저우대학교와 홍콩대학교 연구팀은 지난달 '네이처 지속가능성'에 발표한 논문에서 “단기적으로는 대두(콩) 기반 바이오디젤 등이 현실적인 과도기 연료 역할을 하지만, 2040년 이후에는 재생에너지 기반의 e-연료(e-메탄올, e-암모니아, e-수소 등)가 주도적인 탈탄소 연료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북극항로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이끌 전략적 자산이지만, 단순한 '거리 단축'을 넘어 친환경 대체 연료 선박 건조와 전용 벙커링 인프라 구축이 선제적으로 뒷받침될 때 비로소 진정한 '녹색 회랑'으로 거듭날 수 있을 전망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기업이 배출한 탄소, ‘청구서’로 날아온다…새로운 기후위험 대비를

네팔에서 발생한 대규모 빙하·홍수 재난을 계기로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누가 부담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지난 8월 발생한 히말라야 빙하 관련 홍수로 네팔에서는 최소 1450명이 숨지고 6000명 이상이 실종된 것으로 집계됐다. 발렌드라 샤 네팔 총리는 복구에 필요한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10%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면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커지면서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과학과 법률, 경제의 영역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과거에는 기후변화가 폭염이나 홍수 등 특정 재해를 얼마나 악화시켰는지를 밝히는 데 연구가 집중됐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특정 국가나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이 특정 기후재해의 발생 가능성을 얼마나 높였고, 그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계산하려는 연구가 등장하고 있다. 핵심은 '기후변화가 원인인가'라는 질문에서 '누구의 배출이 어느 정도 기여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 배출과 기후재해를 연결하다 대표적인 연구가 미국 다트머스대학교 연구진이 지난해 4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한 논문이다. 연구진은 화석연료 기업의 배출량을 지구 평균기온 상승과 지역적 극한고온, 경제적 피해까지 연결하는 이른바 '엔드투엔드(end-to-end) 귀속' 접근법을 제시했다. 기업의 배출→온난화→극한기후→경제적 피해라는 연결고리를 정량화한 것이다. 연구진은 셰브론의 배출과 관련된 1991~2020년 극한고온 피해의 경제적 손실을 7910억~3조6000억 달러(약 1076조~4896조 원)로 추정했다. 다만 이 수치가 셰브론이 실제로 해당 금액을 배상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정 기업의 배출이 초래한 온난화가 특정 기후현상의 위험과 경제적 피해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과학적으로 추정한 결과다. 논문 역시 이러한 분석이 향후 기후책임 관련 소송에 활용될 수 있는 과학적 틀을 제시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배출량으로 재해 발생 위험까지 계산 지난 8월 '지구의 미래 (Earth's Future​)' 저널에 발표된 미국 인디애나대학 연구진의 후속 연구는 이 접근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연구진은 누적 CO₂ 배출량과 극한고온·극한강수 발생 위험 사이의 관계를 통계적으로 모델링해 특정 국가나 화석연료 기업의 누적 배출이 특정 기후재해의 발생 가능성을 얼마나 높였는지를 계산했다. 연구 결과 주요 화석연료 기업 10곳의 배출은 2021년 미국 태평양북서부 폭염의 발생 가능성을 약 31% 높인 것으로 추정됐다. 2022년 파키스탄의 극한강수 위험도 약 7% 높인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이 방법을 배출량을 알고 있는 다른 국가나 기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기후책임을 둘러싼 과학적 질문을 상당히 구체화한 것이다. “기후변화 때문에 재해가 발생했다"는 수준을 넘어 “특정 배출 주체의 배출이 없었다면 해당 재해의 위험이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를 계산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물론 이 모델링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배출량이 작은 기업이나 개별 사건에 적용할 경우 더욱 엄격한 불확실성 평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당장은 이 같은 과학적 귀속 결과와 법원이 인정하는 손해배상 책임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과거 탄소의 '미래 청구서'까지 계산 이에 앞서 지난 3월 '네이처'에 발표된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의 연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연구진은 온실가스 배출을 특정 지역의 경제적 피해와 연결하는 '기후 손실과 피해(loss and damage)'의 정량적 산정 체계​를 제시했다. 과거 배출로 이미 발생한 피해뿐 아니라 과거에 배출된 탄소가 앞으로 만들어낼 미래의 피해까지 경제적 가치로 계산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1990년에 배출된 CO₂ 1t은 202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180달러의 피해를 발생시킨 것으로 추정됐다. 또, 2020년 이후에도 2100년까지 추가로 약 1840달러의 피해를 발생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 같은 금액을 특정 기업이나 국가가 법적으로 갚아야 할 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추정치의 불확실성 범위가 각각 40~530달러, 500~5700달러에 이를 정도로 매우 넓기도 하다. 연구진도 이런 피해액이 실제로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법적으로 지급해야 할 금액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그것은 별도의 도덕적·법적 문제라고 명확히 구분한다. 그럼에도 과거의 탄소 배출이 수십 년 뒤에도 경제적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정량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과학에서 법률로, 법률에서 기업으로 이러한 과학적 발전은 기후소송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지난해 7월 기후변화에 관한 권고적 의견에서 국가의 기후변화 대응 의무와 관련한 국제법적 문제를 다뤘다. 특히 여러 국가의 누적된 행위가 기후체계에 피해를 초래하는 상황에서도 국가책임에 관한 기존 국제법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단을 제시했다. 다만 개별 사건에서 인과관계는 구체적으로 입증돼야 한다. 여기서 국가의 국제법상 책임과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ICJ의 권고적 의견이 기업의 과거 배출량에 따라 자동적으로 배상책임이 발생한다는 규칙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이 배출량과 기후피해 사이의 연결고리를 점점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기업을 상대로 한 기후소송에서도 과학적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은 확대되고 있다. ◇당장 '기후부채'로 회계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업이 과거에 배출한 탄소를 모두 금액으로 환산해 당장 회계상 '기후부채'나 '충당부채'로 잡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충당부채로 인식하려면 과거 사건으로 인한 현재의무가 존재하고 경제적 자원의 유출 가능성이 높으며 그 금액을 신뢰성 있게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과거에 온실가스를 배출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조건을 충족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회계상 부채가 아니라고 해서 재무적 위험이 아닌 것도 아니다. 기후 관련 소송이나 규제가 확대되고 특정 기업의 배출과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과학적 방법이 정교해지면, 기업에는 소송비용과 배상금, 규제 대응비용, 보험료 상승, 자본비용 증가 등의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위험이 기업의 미래 현금흐름과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적·전환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지금 배출하고 있는 온실가스는 미래의 기후 리스크로 쌓이고 있다는 얘기다. ◇탄소 감축은 미래 비용을 줄이는 위험관리 기업 입장에서 탄소 배출은 더 이상 현재의 배출비용이나 규제비용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 배출한 탄소가 미래의 기후피해와 법적 분쟁, 경제적 비용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물론 현재의 연구만으로 특정 기업이 과거에 배출한 탄소량을 근거로 미래의 기후재난 피해액을 그대로 청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다. 기후재해에는 자연적 변동성뿐 아니라 지역의 사회·경제적 취약성, 적응 수준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과학적 귀속과 법적 책임 사이에는 여전히 상당한 간극이 있다. 하지만, 간극은 점점 좁혀지고 있다. △누가 배출했는지 추적할 수 있고 △그 배출이 온난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계산할 수 있고 △특정 기후재해의 위험을 얼마나 높였는지 추정하고 △그로 인한 경제적 피해까지 금액으로 산정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 배출한 탄소가 당장 내일 청구서가 되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가는 그 청구서가 날아올 수 있다. 지금의 탄소 감축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비용인 동시에, 미래의 기후 관련 법적·재무적 위험을 줄이는 위험관리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화상 입은 지구’…기온 내려가도 상처는 깊어진다 [기후 리포트]

사람이 뜨거운 물에 손을 잠깐 담갔다 빼면 피부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더 높은 온도에 더 오래 노출될수록 더 심하게 화상을 입고 피부 조직이 손상된다. 기후변화와 지구 생태계도 비슷하다. 지구 평균기온이 1.5℃를 넘어섰다가 다시 내려오더라도 그동안 지구시스템에 축적된 변화가 모두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영구동토와 해양처럼 느리게 반응하는 시스템은 '오버슈트(overshoot, 기온 한계 초과)'의 흔적을 오랫동안 남길 수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최근 보고서에서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 초과가 현실화할 경우 '오버슈트→정점→하강→안정화'​라는 경로를 거치게 되며, 정점의 온도가 높고 초과 기간이 길수록 위험이 커진다고 설명했다. 이런 UNEP 보고서를 정량적으로 뒷받침하는 논문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논문은 UNEP 보고서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얼마나 뜨거웠나'에서 '얼마나 오래 뜨거웠나'로 캐나다 콩코디아대 미첼 디카우 연구원·H. 데이먼 매튜스 교수와 사이먼 프레이저대 커스틴 지크펠트 교수 연구팀은 지난 6월 국제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지구와 환경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진이 제시한 핵심 개념은 '도·년(degree-years)'​이다. 오버슈트 기간 동안 기준 시나리오보다 높은 온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를 누적한 값이다. 예를 들어 기준보다 0.5℃ 높은 상태가 10년 지속되면 5℃·년이다. 연구진은 지구시스템모델을 이용해 42쌍의 오버슈트·기준 시나리오를 비교했다. 그 결과 영구동토와 해양처럼 변화가 느린 생태계에서는 최고기온보다 누적된 도·년이 오버슈트 이후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변수에서는 도·년과 변화 사이의 선형관계가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이는 화상과 비슷하다. 같은 뜨거운 물이라도 피부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뿐 아니라 얼마나 오래 닿았는지가 손상 정도를 결정한다. 기후에서도 오버슈트의 '높이'와 '시간'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버슈트' 때 무슨 일이 벌어지나 우선 극지방 영구동토층에서는 탄소 손실이 나타난다. 오버슈트 기간 동안 상승한 열이 지표면 아래 토양으로 천천히 전달되면서 얼어있던 영구동토층이 녹기 시작하고, 억제됐던 토양 미생물의 유기물 분해 작용이 활성화된다. 매장된 탄소가 이산화탄소와 메탄 형태로 대기 중에 다량 방출된다. 오버슈트가 끝난 뒤 지표면 기온이 내려가 얼어붙은 얼음 땅 일부는 다시 얼어붙을 수 있지만 이미 분해돼 대기 중으로 배출된 탄소가 다시 토양 유기물로 쌓여 동결되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린다. 인간의 시간 지평에서는 복구 불가능한 단방향 자산 손실이다. 배출된 탄소는 지구를 계속 데우는 '탄소 채무(carbon debt)'로 남게 된다. 두 번째는 심해 온난화 및 열팽창 해수면 상승이다. 오버슈트 동안 해수 표면이 흡수한 막대한 열이 해류의 침강과 대류 혼합을 통해 심해에 쌓이게 된다. 이 열은 바닷물 부피를 지속적으로 팽창시켜 열팽창에 의한 해수면 상승을 장기간 유발한다. 다시 기온이 내려가면 대기와 맞닿은 해수 표면은 빠르게 식지만, 심해 열은 수백 년 동안 빠져나가지 못하고 '심해 축적 열 채무(subsurface heat debt)'로 남는다. 세 번째는 심해 산소 결핍이다. 오버슈트 동안 해수 온도가 상승하고 해양 순환이 약화되면서 산소가 결핍되고 이산화탄소가 과다 용해된 표층수가 심해로 하강한다. 심해 산소 농도가 급격히 감소(빈산소화)하면 해양생물 서식지가 크게 축소된다. 심해의 산소 결핍 물 덩어리는 수백 년간 지속될 수 있다. ◇기온은 돌아와도 바다와 영구동토엔 상처가 남는다 연구진은 30개 기후변수의 복원성을 분석했다. 영구동토의 토양 탄소, 최대 대서양 자오선 역전 순환(AMOC) 강도는 연구에서 설정한 기온 복귀 시점에 복원성이 거의 0%로 나타났다. 열팽창에 의한 해수면 상승, 해양 온도와 산소의 복원성도 약 20~25% 수준이었다. 특히 해양은 지표면보다 반응이 느리다. 지표 기온이 다시 낮아져도 오버슈트 기간에 흡수한 열이 심해에 남아 해양 온도와 산소, 열팽창에 따른 해수면 상승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영구동토 역시 한 번 녹아 손실된 탄소가 단기간에 다시 축적되기 어렵다. 대기 중 CO₂를 줄여 표면 기온을 100%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더라도 심해와 영구동토층 깊은 곳에는 수백~수천 년간 한번 입은 상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화상을 입은 피부의 표면 온도가 정상으로 돌아와도 손상된 조직이 즉시 회복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기온이 다시 내려갔다"와 “지구가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는 말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의 의미는 UNEP가 정책적으로 제시한 “오버슈트의 정점과 기간을 줄여야 한다"는 원칙에 구체적인 측정 방법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오버슈트가 불가피하다면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지만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그 상태에 머무르는지, 즉 누적된 '도·년'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연구에서 말하는 '복원성 0%'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구진은 금세기 말 기온이 기준 시나리오로 돌아오는 시점의 상태를 비교했으며, 수백~수천 년에 걸친 장기적인 지구시스템의 회복까지 평가한 것은 아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늘어나는 AI 활용…탄소 배출 줄이는 데 도움될까 [기후 리포트]

인공지능(AI)이 기후변화 대응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AI를 구동하는 데이터센터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고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 환경적 부담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AI가 에너지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핵심 기술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기업의 탄소 배출량을 계산하고, 복잡한 공급망에서 배출이 집중되는 지점을 찾아내며, 위성영상으로 메탄 누출을 탐지할 수 있다. 전력 수요와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예측해 전력망을 최적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하면서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를 넘어서지 않도록 하자는 파리 기후협정의 저지선도 돌파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따라 1.5℃ 아래로 다시 내려오는 데 필요한 2050년 넷제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탄소 배출을 보다 빠르고 정밀하게 줄일 수 있는 기술이 시급해졌다. AI가 주목받는 이유다. ◇AI로 기업 탄소 회계 자동화 기업의 기후 대응에서 출발점은 정확한 탄소 배출량 측정이다. 하지만 기존 탄소 회계(Carbon Accounting)는 여러 사업장과 부서에서 데이터를 수집해 사람이 취합·검증하는 경우가 많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오류가 발생하기도 쉬웠다. 일부에서는 AI가 이러한 탄소 회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3월 학술논문 사전 공개 플랫폼 '프리프린츠(Preprints.org)'에 게재된 한 논문에서는 AI 기반 탄소 회계 도구를 도입한 120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를 소개했다. 조사 대상 기업의 75%가 데이터 정확도 향상을 경험했고, 78%는 보고 과정의 효율성이 개선됐다고 답했다. 46%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제 대응 능력도 크게 향상됐다고 평가했다. AI가 단순한 업무 자동화를 넘어 기업의 탄소정보 관리와 규제 대응 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초기 투자비용과 기존 정보시스템과의 통합, 직원들의 기술 적응 등은 과제로 지적됐다. ◇공급망 탄소 배출도 한눈에 확인 기업 내부뿐 아니라 복잡하게 연결된 글로벌 공급망 전체의 탄소 배출을 추적하는 데도 AI와 디지털 기술의 결합이 활용되고 있다. 지난 2024년 국제산업·시스템공학회(IISE) 연례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연구에서 아랍에미리트 칼리파 과학기술대학교 연구진은 블록체인·사물인터넷(IoT)·AI를 결합한 지속가능한 공급망 탄소 회계 체계​를 제안했다. IoT 센서가 생산 현장의 데이터를 수집하면 블록체인이 데이터의 투명성과 위변조 방지를 지원하고, AI가 공급망 전체의 데이터를 분석해 탄소 배출이 집중되는 '핫스팟'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산업단지처럼 여러 기업과 생산설비가 밀집한 공간에서는 디지털 트윈과 에지 AI를 활용한 탄소 관리 기술도 등장하고 있다.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은 실제 공장·설비·전력망 등의 상태와 작동을 가상공간에 똑같이 구현해 실시간 데이터를 바탕으로 상태를 분석하고 미래 상황을 예측하는 기술을 말한다. 에지 AI(Edge AI)는 데이터를 중앙 서버나 클라우드로 보내지 않고 센서나 기기 등 데이터가 발생하는 현장에서 AI가 직접 분석·판단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의 버질 페피스 교수팀은 현 센서의 오류나 데이터 누락이 발생하더라도 AI가 남아 있는 데이터를 활용해 탄소 배출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위성으로 메탄 누출까지 찾아낸다 AI의 활용이 특히 주목되는 분야가 메탄이다. 메탄은 단기간 온난화 효과가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강해 조기 감축의 기후효과가 크지만, 배출원이 다양하고 간헐적으로 발생해 누출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지난달 국제학술지 '환경과학·기술(Environmental Science & Technology)'에 실린 리뷰 논문에서는 2018~2025년 발표된 메탄 배출 관련 AI·머신러닝 연구 63편, 93개 모델 사례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메탄 배출을 '찾아내기→배출량을 계산하기→감축 조치로 연결하기'의 세 단계로 나눠 AI의 활용 가능성을 분석했다. 메탄 배출 모니터링(감지, 위치 추적, 정량화, 예측)과 이를 실제 감축과 연계하는 방안 등을 검토한 것이다. 실제로 AI는 위성·항공영상과 지상 센서 등을 분석해 메탄이 새는 지점과 배출 규모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느 곳부터 점검하고 수리해야 가장 큰 감축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판단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AI 기술을 이용하면 위성사진을 분석해 가로·세로 약 100m 정도의 작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메탄 누출도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초분광영상 분석에 특화된 AI 모델인 '메타넷(MethaNet)'은 시간당 40㎏이 넘는 대규모 메탄 배출원의 배출량을 실제 값과 약 17% 정도의 오차 범위에서 추정했다. 연구진은 그러나 AI의 역할이 누출을 찾아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실제 시설을 보수해 얼마나 많은 메탄을 줄였는지 측정·검증하는 단계까지 연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력망도 AI로 탄소 최적화 전력 수요를 사전에 예측하고 전력망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에도 AI가 활용되고 있다. 지난달 '국제 정보통신기술 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에 발표된 연구에서 중국 국가전망 신장전력공사 연구진은 새로운 전력 소비 예측 모델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건물과 산업시설의 시간별 에너지 사용 데이터를 학습해 전력 소비와 탄소 배출 패턴을 예측한다. 이 같은 기술을 활용하면 전력 수요가 급증하기 전에 피크 부하를 분산하고,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량 변화에 맞춰 전력망을 조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전력계통의 탄소집약도를 낮추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슈나이더 일렉트릭은 AI를 활용해 에너지 시스템과 전력망 운영을 최적화하고 있다. 미국의 송전망 기술기업 라인비전(LineVision)은 기상·풍속 데이터를 분석해 기존 송전선의 송전 가능 용량을 높이는 동적 송전용량(DLR)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AI의 탄소 발자국보다 감축 효과가 클까 AI와 데이터센터의 환경 부담에 대한 우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AI 연산량이 증가할수록 데이터센터의 전력과 물 사용량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 AI가 화석연료 채굴과 운반, 이용에서 채산성을 높여 화석연료 사용을 부추겨 온실가스를 더 많이 배출하도록 한다. 하지만 AI가 에너지·산업·운송 등 전 분야의 효율을 높일 경우 그 감축 효과가 AI 자체의 환경 부담을 넘어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이크로소프트 지속가능성 과학·혁신 부문의 에이미 루어스(Amy Luers) 박사 등은 2024년 4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기고한 글에서 “AI가 산업 전반의 효율성을 높여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지만, AI 자체의 에너지·자원 소비에 따른 환경 부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5년 4월 발표한 '에너지와 인공지능(Energy and AI)' 보고서에서 AI를 에너지·산업·운송·건물 등에 광범위하게 적용할 경우 2035년 연간 약 14억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어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 니컬러스 스턴 등이 참여한 연구진은 2025년 6월 국제학술지 'npj 기후행동(Climate Action)'에 발표한 연구에서 AI를 전력·식품·모빌리티 분야에 적용하면 2035년 연간 32억~54억t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잠재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AI의 진정한 가치는 탄소가 어디에서 발생하고 언제 증가하며 어떤 조치를 취했을 때 얼마나 줄어드는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실제 감축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바로 AI가 동시에 탄소 감축을 가속화하는 '넷제로 내비게이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155GW 태양광 목표의 열쇠, ‘농사 지으며 전기 파는’ 영농형 태양광 [기후 리포트]

최근 발표한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안에서 정부는 2040년까지 태양광 발전설비를 155기가와트(GW) 이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목표가 커질수록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라는 국토 문제가 커진다. 산지 태양광은 환경 훼손 논란으로 확대가 어려워졌고, 농지로 향하는 태양광은 농민과 지역사회의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해법으로 영농형 태양광(agrivoltaics)​이 주목받고 있다. 농지를 발전소로 전환하는 대신 농사를 계속 지으면서 그 위에 태양광 설비를 설치하는 방식이다. 식량 생산을 유지하면서 농가에 안정적인 발전수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지상형 태양광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155GW의 벽은 '땅'이다 제12차 전기본 안에 따르면 정부는 2030년 재생에너지 설비 100GW, 사업용 태양광 87GW를 확보하고 2040년에는 사업용 태양광을 155.3GW까지 늘릴 계획이다. 그러나 지상형 태양광만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연간 수 GW의 신규 태양광을 설치하려면 매년 수십㎢의 토지가 필요하다. 산지 개발을 줄이면 농지와 평지에 대한 압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산지 태양광 신규 보급 비중은 2017년 약 40%에서 최근 3%대로 급감했다. 산지 태양광에 대한 환경 훼손 논란과 입지 규제가 강화되면서 태양광 개발 수요가 상대적으로 평지와 농촌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도 갈등이 만만치 않다. 외지 개발업체가 농민으로부터 농지를 임차하거나 매입해 대규모 태양광 발전사업을 추진하면서 농지가 장기간 발전시설 용도로 묶이고 농업 생산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사업 수익은 개발업체가 가져가는 반면 경관 훼손, 토지 이용 변화, 주변 농지의 가치 하락 등 부담은 지역 주민이 떠안을 수 있다는 인식이 갈등을 키우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태양광 시설이 주거지나 축사, 도로 등에 얼마나 떨어져야 하는지를 정하는 이격거리 규제를 둘러싸고 지자체와 사업자, 주민 간 충돌도 이어지고 있다. 농민단체의 반발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농촌이 도시의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발전시설 입지로만 취급되고, 정작 발전사업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은 외부 자본이 가져가는 구조라면 농민들이 재생에너지 확대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농사와 발전' 결합하니 정치적 갈등도 낮아져 영농형 태양광의 사회적 수용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ETH Zürich)와 취리히응용과학대 연구진은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영농형 태양광이 토지 기반 태양광에 대한 정치적 양극화와 지역 반대를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스위스 성인 21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일반적인 지상형 태양광에는 보수 성향 주민과 농촌 주민의 반대가 상대적으로 컸지만 영농형 태양광에는 보수층의 지지도가 크게 높아졌다. 주민 수용성을 좌우한 것은 이념보다 사업 설계였다. 연구진은 △농작물 수확량 감소 최소화 △지역 농민·주민 중심의 소유 구조 △경관을 고려한 소규모·분산형 개발을 핵심 요인으로 꼽았다. 특히 수확량 감소가 5% 미만일 때 지지가 크게 높아졌고, 외부 투자자보다 농민이나 주민협동조합 등이 사업에 참여할 경우 수용성이 높아졌다. ◇한국도 특별법…'농사가 우선' 원칙 세워야 국내에서도 영농형 태양광의 제도화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6월 공포돼 오는 12월 시행을 앞둔 영농형 태양광 특별법은 농업과 발전의 병행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국내 실증에서도 영농형 태양광의 농업적 가능성이 확인되고 있다. 들깨와 참깨 등은 일정 수준의 차광 조건에서도 생육과 수확량의 감소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작물로 평가된다. 특히 한여름 강한 일사와 고온이 지속되는 시기에는 태양광 패널이 일부 햇빛을 차단하면서 토양 수분 증발과 작물의 고온 스트레스를 줄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차광을 선호하는 녹차의 경우에는 오히려 생육 환경이 개선돼 생산량이 증가한 실증 사례도 보고됐다. 녹차는 강한 햇빛을 그대로 받기보다 일정 정도 그늘이 지는 환경에서 잎의 품질과 생육이 좋아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작물에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물별 광합성 특성과 적정 일사량에 맞춰 패널의 높이·간격·차광률을 설계한다면, 농업 생산과 태양광 발전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영농형 태양광이 농촌의 새로운 소득원으로 자리 잡는다면 농민 10만명이 100kW씩 참여해 10GW를 생산하는 '햇빛연금' 모델도 가능하다. 다만 핵심은 외부 자본의 농지 개발이 아니라 실제 농민이 사업의 주체가 되고 농업 생산을 우선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태양광 155GW의 진짜 병목은 '전력망' 영농형 태양광에도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다. 바로 송배전망이다. 태양광이 집중된 호남·영남 남부지역에서는 발전설비 증가에 비해 송전망 확충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신규 발전사업의 계통 접속이 지연되거나 발전량이 제한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결국 155GW 목표의 성패는 태양광 패널을 얼마나 빨리 설치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농지를 보전하면서 농민이 수익을 얻고, 주민이 사업에 참여하며, 생산된 전기를 소비지까지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영농형 태양광은 그 해법 가운데 하나다. 정부가 12월 특별법 시행을 계기로 '농사가 우선이고 발전은 그 위에 얹는 것'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동시에 전력망 투자를 서둘러야 155GW라는 목표가 현실이 될 수 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폭염에 흔들리는 아이들…정신건강 악화에 뇌 발달 지연까지 [기후 리포트]

기후변화로 폭염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는 가운데 어린이들이 고온에 노출될 경우 정신건강뿐 아니라 뇌의 발달 과정에도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두 가지 연구 결과가 주목을 끌고 있다. 하나는 폭염과 어린이·청소년의 정신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세계적으로 종합한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임신기와 영유아기의 고온 노출이 취학 전 아동의 신경발달 지연과 관련된다는 대규모 중국 연구다. ◇기온 1℃ 오르면 정신건강 위험 0.9% 증가 정신건강과 관련된 연구는 호주 플린더스대학교 등의 연구진이 최근 '국제 역학 저널 (International Journal of Epidemiology)'​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2000~2024년 국제적으로 발표된 연구 2만3045건을 검토해 최종 23개 연구, 약 2600만 명​의 자료를 종합했다. 연구 대상에는 미국과 캐나다, 중국, 베트남, 터키, 호주, 핀란드 등의 자료가 포함됐다. 미국 연구가 10건으로 가장 많았고 중국이 3건이었다. 분석 결과, 일평균 기온이 1℃ 상승할 때 어린이·청소년의 정신건강 관련 위험이 0.9% 증가했다. 특히 5~18세는 1.5~1.6% 증가해 가장 취약한 연령대로 나타났다. 폭염 시기만 따로 분석했을 때 전체 연령에서는 통계적으로 뚜렷한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5~18세에서는 폭염 기간 정신건강 관련 위험이 25.3% 증가했다. 다만 폭염만 분석한 연구가 4건에 불과해 연구진은 이 결과를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논문에서 말하는 정신건강 결과는 단순히 기분이 나빠지는 정도가 아니다. 분석 대상에는 정신건강 문제로 인한 응급실 방문, 입원, 외래진료, 위기상담 전화와 정신질환 진단 등이 포함됐다. 다만 연구 수가 부족해 우울증, 불안장애, ADHD 등 개별 질환별 위험을 구체적으로 산출하지는 못했다. ◇임신 중 폭염도 아이의 뇌 발달에 영향 뇌 발달과 관련된 두 번째 연구는 중국 푸단대학교 연구진이 지난 2월 '네이처 기후변화(Nature Climate Change)'에 발표한 논문이다. 연구진은 중국 551개 도시에서 3~5.5세 어린이 10만1228명​을 대상으로 임신 중부터 출생 후 3세까지의 고온 노출과 신경발달을 조사했다. 연구 대상은 중국 전국에 걸쳐 있어 지역별 기후 차이도 반영했다. 아이들의 발달은 언어·의사소통, 대근육 운동, 소근육 운동, 문제 해결, 개인·사회적 능력 등 5개 영역을 평가했다. 그 결과 ​임신 중 극심한 고온에 노출된 경우 신경발달 지연 위험이 35% 높았고, 출생 후 3세까지 극심한 고온에 노출된 경우에는 53% 높았다. 특히 고온과 발달 지연의 관계는 단순히 일정하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온도에서 위험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J자형 관계를 보였다. 출생 후에는 여러 가지 폭염 정의를 적용해도 폭염 노출 기간이 길어질수록 신경발달 지연 위험이 증가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폭염은 어떻게 뇌와 마음을 흔드나 두 연구가 다루는 결과는 서로 다르지만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즉 두 번째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뇌가 만들어지는 시기의 취약성'이고, 첫 번째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성장한 어린이·청소년에게 나타날 수 있는 '정신건강상의 위험'​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건강 연구에서는 고온에 따른 탈수, 피로, 짜증과 신체적 스트레스, 그리고 더운 밤의 ​수면장애 등이 정서 조절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제시됐다. 야외활동과 학교생활의 차질, 부모의 스트레스와 가족 갈등 역시 간접적인 경로가 될 수 있다. 뇌 발달 연구에서는 고온이 스트레스 반응을 활성화해 코르티솔을 증가시키고, 뇌의 염증과 산화스트레스를 유발할 가능성​이 제시됐다. 특히 태아기부터 영유아기는 뇌가 빠르게 구조적·기능적으로 발달하는 시기여서 환경적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폭염 대책도 '열사병 예방'에서 '뇌와 마음 보호'로 이번 두 연구가 폭염이 특정 정신질환이나 신경발달 장애를 직접적으로 일으킨다고 확정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연구는 관찰된 연관성을 종합한 메타분석이고, 두 번째 연구 역시 고온 노출과 신경발달 지연의 관계를 분석한 관찰연구다. 따라서 인과관계를 확정하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들 연구는 폭염 대응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임신부와 영유아는 폭염으로부터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가정과 보육시설의 냉방·환기, 충분한 수분 공급, 야외활동 조절 등 기본적인 열 노출 저감 대책이 중요하다. 학교 역시 폭염 기간 실내 온도를 관리하고 수업·체육활동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폭염이 장기화될 때 어린이의 수면장애, 과도한 피로, 불안·짜증, 행동 변화 등을 조기에 살피고 필요한 경우 정신건강 지원으로 연결하는 체계도 필요하다. 정신건강 연구진 역시 기후적응 정책에 어린이 정신건강을 포함하고 고위험 아동을 대상으로 한 보호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마르는 지구, 빈곤해지는 식탁…2050년 ‘식량 재난’ 온다

전 세계가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반도 남부 지방은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며 농작물 피해가 속출하고 있고, 유럽과 미국의 주요 강들 역시 역대 최저 수위를 경신하며 물류와 전력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가뭄의 빈도와 강도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식량 위기'에 대한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 국내외 가뭄 상황 '심각'… 강물 마르고 댐 바닥 드러내 국내 상황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재난 수준에 도달했다. 경남 18개 시군의 농업용수 평균 저수율은 35%로 평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49.4%에 불과하다. 특히 경남 밀양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농업용수 가뭄 '심각' 단계에 진입했고, 백안저수지의 경우 저수율이 1.2%까지 추락했다. 호남평야의 젖줄인 섬진강댐 저수율은 19.5%까지 떨어지며 가뭄 '경계' 단계에 접어들었다. 급기야 지난 11일에는 경남 지역에 국가소방동원령이 발령됐다. 소방청은 전국 소방력을 투입해 경남지역에 농업·생활용수 공급을 지원하기로 했다. 가뭄으로 국가소방동원령이 선포된 것은 지난해 8월 강릉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해외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유럽의 다뉴브강은 독일에서 흑해까지 10개국을 관통하는 구간 대부분에서 역대 최저 수위를 기록하고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수자원 당국은 다뉴브강 수위가 종전 최저치보다 10㎝ 더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원전 냉각수 확보에 비상이 걸려 루마니아는 다뉴브강 암반을 폭파해 물길을 바꾸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시행했다. 미국에서도 최대 저수지인 미드호의 수위가 1040.5피트로 1937년 댐 조성 이래 약 9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 기후변화가 부른 '복합 재난'… 2050년 식량 안보 위협 문제는 이러한 가뭄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폭우가 내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폭염과 가뭄이 나타나는 극단적인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기후변화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학계에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잦은 가뭄이 향후 글로벌 식량 공급망을 파괴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미국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지구환경과학부 연구진은 지난해 12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한 논문에서 2050년까지 전 세계 인구가 98억 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가뭄이 식량 안보의 주요 동인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2050년까지 전 세계 62개국이 10% 이상의 농작물 손실을 경험하고, 24개국에서는 그 손실이 20%를 넘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대두(콩)는 특정 국가에서 최대 92.7%까지 생산량이 감소할 수 있는 가장 취약한 작물로 꼽혔다. 이탈리아 토리노 공과대학과 미국 델라웨어대학 연구팀은 지난 5월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한 연구를 통해 역사적 극한 기후 상황에서 전 세계 천수답(비에 의존하는 논) 생산 손실이 10.1%에 달하고, 이는 21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칼로리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추산했다. 또 인도 간디나가르 기술연구소(IITGN) 연구팀은 최근 '커뮤니케이션즈 지구 및 환경(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발표한 논문에서 중등도 가뭄 발생 시 주요 농업 지역의 작황 실패 확률이 25% 이상에 이르고, 옥수수와 대두의 경우 일부 지역에서 40~50%까지 치솟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뭄은 식량의 '양'뿐만 아니라 '질'까지 떨어뜨린다. 캐나다 캘거리 대학 생물과학부 연구팀은 최근 국제 학술지 '셀(Cell)'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가뭄 스트레스를 받는 식물은 철분 흡수 능력을 스스로 차단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가뭄이 농작물의 수확량 감소뿐 아니라 철분 함량 등 영양학적 질을 떨어뜨려 인간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 “비만 기다리는 시대 끝났다"… 선제적 대책 절실 전문가들은 단순한 기술적 해결을 넘어 통합적인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환경공학부 감종훈 교수는 지난 2월 한 인터뷰에서 “재난 대응은 수자원 확보라는 기술적 해결을 넘어 대중의 인식과 소통을 고려해야 한다"며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사회적 반응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해 여름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던 강원도 강릉을 비롯해 국내 지자체들은 대체 수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강릉시는 연곡 지하수 저류 댐 설치 등 대체 수원 마련을 통해 실효적인 가뭄 예방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통영 욕지도에서도 내년 완공을 목표로 62억 원을 투입해 지하수 저류 댐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관개 시설 확대와 기후 내성 작물로의 전환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속 가능한 관개 확대와 작물 전환을 결합할 경우 가뭄으로 인한 손실의 62%를 방지하면서도 생산량을 14%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 정부의 경우 가뭄 취약 지역 농민들에게 콩류, 수수 등 물을 적게 필요로 하는 내한 작물로 재배 작물을 변경할 것을 공식 주문하고 나서고 있다. 가뭄은 이제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가 직면한 이 거대한 마름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학계, 그리고 시민 모두의 선제적이고 통합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기후 리포트]EU 탄소시장 대수술…‘규제’에서 ‘산업투자’로 무게중심 옮긴다

유럽연합(EU)이 세계 최대 탄소시장인 배출권거래제(EU ETS)를 전면 개편한다. EU는 지난 17일(현지 시간) 배출권거래제 개편안을 발표하는 등 탄소 규제 중심의 정책을 산업 경쟁력과 탈탄소 투자 지원을 결합한 새로운 체계로 전환하는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번 개편은 단순히 온실가스 감축 규제를 강화하는 차원을 넘어 산업 경쟁력과 에너지 안보까지 함께 고려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해운·항공 규제 확대, 대규모 탈탄소 투자 지원이 함께 추진돼 한국 수출기업의 대응 전략도 달라져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기업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내용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Q1. EU는 왜 지금 배출권거래제를 다시 손질하려는 것인가. EU ETS는 2005년 도입 이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탄소시장으로 평가받아 왔다. 실제로 대상 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005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줄었고, 배출권 판매 수익은 청정에너지와 혁신기술 투자에 활용됐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미국과 중국이 대규모 산업 지원 정책을 펼치면서 유럽 기업들의 경쟁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2040년 온실가스 90% 감축 목표까지 제시되면서 기존 제도를 산업 경쟁력까지 고려하는 방향으로 재설계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번 개편은 '탄소중립'과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Q2. 이번 개편의 핵심은 무엇인가. 가장 큰 변화는 배출권거래제를 단순한 규제 수단이 아니라 기업의 탈탄소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으로 바꾸는 것이다. EU는 배출권 공급 감소 속도를 일부 조정해 산업계의 부담을 완화하는 대신 1000억 유로(약 160조 원) 규모의 산업탈탄소화은행(IDB)을 신설하고 청정기술 투자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또 탄소 제거 기술을 제도 안으로 편입하고, 해운과 항공 등 적용 대상도 확대해 탄소 감축을 위한 투자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배출권 감축 속도 조절의 경우 매년 배출권 공급량을 줄이는 비율(선형감축률, LRF)을 2031~2035년에는 3.7%, 2036~2040년에는 1.7%로 설정했다. 이는 기존의 가파른 감축 경로보다 완화된 것으로, 산업계에 보다 점진적인 적응 기간을 제공한다. CBAM 적용 업종에 대한 무상할당 폐지 시점을 기존 2034년에서 2038년까지로 연장해 기업 부담을 늦춰준다. 대신 무상 배출권을 받으려면 반드시 탈탄소 투자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해야 한다는 '조건부 무상할당' 원칙을 강화했다. 아울러 항공 및 해운 부문 규제를 강화하고, 생활폐기물 소각 시설까지 ETS 적용 범위를 넓혀 탄소 배출에 대한 책임을 더 촘촘히 묻기로 했다. 이밖에 대기 중의 탄소를 직접 포집하는 기술 등으로 확보한 '탄소 제거 크레딧'을 ETS 체제 안에 편입시켜 기업들에 유연성을 제공하기로 했다. Q3. 탄소 제거 기술을 EU ETS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앞으로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직접 제거해 영구적으로 저장한 실적도 일정 범위에서 배출권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이산화탄소 1톤을 배출했다면 배출권 1장을 제출하는 대신, 직접공기포집(DACCS)이나 바이오에너지 탄소포집·저장(BioCCS) 등을 통해 대기 중 탄소 1톤을 제거했다는 공식 인증(CRCF)을 받으면 같은 효과를 인정받는 방식이다. 탄소를 줄이는 것뿐 아니라 이미 배출된 탄소를 없애는 활동까지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미다. EU는 이를 위해 '제거 기반 배출권(Removal-backed Allowances)'이라는 새로운 개념도 도입할 계획이다. 우선 탄소 제거 물량만큼 배출권 총량을 늘린 뒤 이를 경매하고, 경매 수익으로 고품질 탄소 제거 프로젝트를 직접 지원하는 구조다. 현재 탄소 제거 기술은 비용이 배출권 가격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에 EU가 초기 시장을 만들어 민간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같은 제도는 철강과 시멘트, 화학처럼 공정 특성상 탄소를 완전히 없애기 어려운 산업에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시에 배출권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급등하는 것을 완화하고, 탄소 제거 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육성하려는 목적도 담고 있다. 탄소 제거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시장이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Q4. 한국 수출기업에는 어떤 영향이 가장 클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CBAM에 따른 탄소 비용 증가다. 현재 EU 배출권 가격은 한국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철강과 알루미늄, 시멘트, 화학 등 유럽으로 수출하는 기업들은 앞으로 탄소배출량을 더욱 정교하게 관리해야 한다. 배출량이 많을수록 추가 비용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 탄소배출 관리 능력이 가격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Q5. EU 기업은 보호받고 한국 기업은 불리해지는 것 아닌가. EU는 자국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막기 위해 무상 배출권 지급을 기존 계획보다 4년 연장했다. 그러나 무조건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은 반드시 '유럽 내 탈탄소 투자 계획'을 제출하고 실제 투자까지 완료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배출권을 지원받는 대신 그만큼 유럽 안에서 친환경 설비에 투자하도록 의무를 부과한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 생산해 유럽으로 수출하는 기업은 이러한 혜택을 받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가능성이 있다. Q6. 유럽에 공장을 둔 한국 기업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가능성이 충분하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LG, SK 등 유럽 현지 생산기지를 보유한 기업들은 EU 혁신기금이나 산업탈탄소화은행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EU 혁신기금은 기업의 국적과 관계없이 신청할 수 있지만, 프로젝트는 반드시 EU 역내에서 수행돼야 한다. 따라서 유럽 현지 공장의 저탄소 설비 투자나 신기술 도입은 오히려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Q7. 해운업계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이번 개편으로 가장 큰 변화를 맞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해운이다. EU ETS는 유럽경제지역(EEA) 항만을 오가는 선박에 대해 항해 중 발생한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 배출량을 보고하고, 그 배출량에 해당하는 배출권을 구매·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기존에는 5000GT(선박 내부 공간의 크기를 나타내는 총톤수 기준으로 5000톤) 이상 대형 선박이 대상이었지만 앞으로는 400GT 이상의 중소형 선박까지 관리 대상이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이에 따라 국내 해운사들은 온실가스 배출량 모니터링과 보고(MRV), 배출권 구매, 연료 사용 관리 등 새로운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특히 유럽 항만을 자주 이용하는 선사일수록 행정 비용과 운영 비용이 함께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Q8. 항공업계에는 어떤 변화가 예상되나. 유럽 노선을 운항하는 국내 항공사들도 탄소 비용 증가를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EU는 국제선에 대한 ETS 적용을 확대하고 지속가능항공유(SAF) 사용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항공사들은 배출권 구매뿐 아니라 SAF 사용 비용까지 함께 부담해야 한다. 결국 연료 효율 개선과 차세대 항공기 도입이 비용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Q9. 국내 배출권거래제(K-ETS)도 영향을 받게 될까. 전문가들은 EU의 이번 개편이 한국 배출권거래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이미 제4차 계획기간(2026~2030년)을 시작하면서 유상할당 확대와 시장안정화제도 도입 등을 추진하고 있다. EU ETS 개편으로 배출권 공급은 줄어들고 국내 배출권 가격이 점진적으로 상승할 가능성도 높아 기업들의 배출권 구매 부담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Q10. 한국 기업은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까. 전문가들은 탄소 규제를 환경 문제가 아니라 경영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선 제품별 탄소배출량을 정밀하게 관리하고, 재생에너지와 전기화 설비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동시에 EU 현지 생산기지 확대 여부와 혁신기금 활용 가능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제품 가격뿐 아니라 탄소 경쟁력이 수출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Q11. 이번 개편안은 언제부터 시행되나. 이번 개편안은 곧바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약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EU 집행위원회는 앞으로 유럽의회와 EU 이사회의 입법 협상을 거쳐 2027년 1분기 최종 법안 확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후 회원국들은 2028년까지 관련 법령을 정비하고 일부 조항을 먼저 시행하게 된다. 개정된 EU ETS의 대부분 규정은 2029년부터 본격 적용되며, 해운 부문 적용 확대와 경매수익 사용 강화 등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개편안의 핵심인 '투자 조건부 무상할당제'는 2031년부터 시행된다. 이에 따라 EU 내 기존 생산시설이 무상 배출권을 계속 받으려면 2029년 9월까지 탈탄소 투자계획을 제출해야 하며, 실제 투자 여부에 따라 무상할당 규모가 결정된다. 같은 해 생활폐기물 소각시설도 EU ETS에 편입되기 시작한다. 한국 기업들도 향후 2~3년을 유럽 시장 대응 전략을 재정비할 마지막 준비 기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Q12. 이번 개편은 기후위기 대응의 후퇴일까, 아니면 진전일까. 평가는 엇갈린다. 환경단체들은 무상할당 연장과 감축 속도 조절이 기후 대응을 늦출 수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EU는 산업이 경쟁력을 유지해야 지속적인 탈탄소 투자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분명한 것은 이번 개편이 규제를 완화한 것이 아니라 투자 중심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꿨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탄소를 배출하면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핵심이었다면, 앞으로는 누가 더 빠르게 저탄소 설비에 투자하느냐가 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 EU ETS 개편은 탄소 규제가 환경정책을 넘어 산업정책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Q13. EU ETS는 얼마나 큰 시장인가. 2005년 출범한 세계 최대 탄소시장으로, EU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40%를 관리하고 있다. 발전소와 철강·시멘트·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 항공, 해운을 포함해 1만 개 이상의 시설과 사업자가 참여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 기반 온실가스 감축 제도로 평가받는다. 2005년 이후 지금까지 2,700억 유로(약 430조 원)의 수익을 창출했고, EU 통합 레지스트리에 등록된 배출권 자산 가치는 2,000억 유로(약 320조 원)를 넘는다. 최근 배출권 가격은 이산화탄소 1톤당 약 80유로(약 13만 원) 수준이며, 매년 약 80억 개의 배출권이 거래되는 등 연간 거래 규모만 약 2,000억 유로에 달한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기후 리포트] 초고령 사회 덮친 폭염…선풍기와 ‘팔 담그기’가 생명줄

여름마다 극심한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노인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한국에서는 폭염이 단순한 기상재해를 넘어 공중보건 문제가 됐다. 노인은 젊은 사람보다 땀 분비와 피부 혈류 조절 능력이 떨어져 몸속 열을 제대로 내보내지 못한다. 갈증 감각 저하와 만성질환까지 겹치면 탈수와 열사병, 심혈관계 부담 위험은 더욱 커진다. 최근 국내외 연구들은 노인이 왜 폭염에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선풍기와 피부에 물 묻히기, 시원한 물에 손과 팔뚝 담그기 같은 간단한 대응법을 제시했다. ◇서울 폭염 일수 10년 새 31일 증가 을지대학교 환경보건안전학과 권석순 연구원과 갈원모 교수는 지난해 6월 '한국재난정보학회 논문집'에 '폭염이 노인 건강과 사망 요인에 미치는 영향 분석'을 발표했다. 연구진이 2012~2024년 서울의 여름 기온을 분석한 결과, 평균 최고기온은 2012년 28.6℃에서 2024년 30.7℃로 상승했다. 2014년과 2024년을 비교하면 하루 최고기온 33℃ 이상인 날은 9일에서 40일로 31일 늘었다. 질병관리청 응급실 온열질환 감시체계에 따르면, 신고된 국내 온열질환자는 2023년 2818명에서 2024년 3704명, 2025년 4460명으로 늘었다. 추정 사망자는 2023년 32명에서 2024년 34명, 2025년 29명으로 집계됐다. 2011~2025년 누적 추정 사망자는 267명으로, 이 가운데 95.8% 이상인 256명 이상이 열사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노인은 특히 취약하다. 이전 연구에서는 일정한 역치온도 이상에서 기온이 1℃씩 오를 때 온열질환자가 일반 연령층은 56% 증가한 데 비해 노인 남성은 62%, 노인 여성은 74% 증가했다. ◇노인은 왜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나 사람의 몸은 더워지면 피부 혈관을 확장해 열을 피부로 보내고 땀을 증발시켜 체온을 낮춘다. 하지만 노화가 진행되면 땀 분비와 피부 혈류 증가 반응이 둔해진다. 몸 안에 열이 더 쉽게 쌓이는 것이다. 체온을 낮추기 위해 피부로 혈액을 보내면 심장은 더 빨리 뛰어야 한다. 땀으로 수분까지 잃으면 혈액량이 줄어 심혈관 부담은 더욱 커진다. 심장병이나 뇌혈관질환을 가진 노인에게 폭염이 특히 위험한 이유다. 국내 연구진은 폭염이 심혈관·호흡기·신경계 질환 부담을 높이고 인지 기능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지적했다. 다만 폭염과 알츠하이머병 사망 증가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이번 연구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32℃ 넘으면 선풍기 끄라?"…습도가 변수 캐나다 몬트리올심장연구소와 몬트리올대학교, 호주 시드니대학교 등의 국제 공동연구진은 지난해 7월 'JAMA 네트워크 오픈(Network Open)' 저널에 노인의 선풍기 사용 효과를 분석한 연구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평균 68세 노인 58명을 38℃·습도 60%의 고온다습 환경과 45℃·습도 15%의 극고온 건조 환경에 노출해 선풍기와 '피부 적심(skin wetting)' 효과를 비교했다. 38℃·습도 60%에서는 선풍기를 사용했을 때 심부체온이 대조군보다 평균 0.1℃ 낮아지고 열적 쾌적감도 개선됐다. 습한 환경에서 선풍기가 땀의 증발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반면 45℃·습도 15%에서는 선풍기 사용자의 심부체온이 0.3℃ 더 상승하고 땀 배출량도 시간당 270mL 늘었다. 뜨거운 공기가 피부로 열을 전달하면서 선풍기가 사실상 '열풍기' 역할을 한 것이다. 연구 결과는 “32℃가 넘으면 선풍기를 끄라"는 획일적인 기준보다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피부에 물을 뿌리거나 묻히는 '피부 적심'도 효과를 보였다. 38℃·습도 60%에서 피부를 적신 참가자는 땀 배출량이 시간당 평균 67mL 감소했다. 45℃·습도 15%에서는 121mL 줄었다. 외부에서 공급한 물이 증발하면서 땀과 같은 냉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체내 수분량이 적고 갈증 감각이 둔한 노인에게 피부 적심은 탈수 부담을 줄이면서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20℃ 물에 손과 팔뚝 10분 담갔더니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운동학과와 건강노화센터의 레이첼 M. 코틀 박사 연구팀은 지난해 '실험 생리학(Experimental Physiology)' 저널에 손과 팔뚝 냉각 효과를 분석한 연구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평균 74세 노인 12명을 기온 34℃·습도 77% 환경에 2시간 동안 노출했다. 참가자들은 실험 60분과 90분 시점에 각각 10분 동안 양손과 팔뚝을 20℃의 물에 담갔다. 일반적인 시원한 수돗물 온도를 고려한 것이다. 냉각하지 않은 경우 심부체온은 70분 동안 평균 0.27℃ 상승했지만 손과 팔뚝을 물에 담근 경우 상승 폭은 0.09℃에 그쳤다. 심박수도 낮아졌다. 실험 종료 시점에서 냉각한 참가자의 평균 심박수는 대조 조건보다 분당 8회 낮았다. 심근 산소 소비와 심혈관 부담을 나타내는 '이중곱(rate-pressure product·RPP)' 상승도 억제됐다. 연구진은 “손과 팔뚝은 면적에 비해 혈류량이 많고 열 전달에 유리하다"면서 “이 부위를 물에 담그면 혈액이 식어 다시 몸 안으로 순환하면서 체온 상승을 늦춘다"고 설명했다. ◇폭염 대응, '물과 바람'을 다시 봐야 폭염 속 노인의 생명을 지키는 방법이 반드시 거대한 냉방시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대의 선풍기와 물 한 대야가 체온 상승을 늦추고 지친 심장의 부담을 덜어주는 생명줄이 될 수 있다. 고온다습한 폭염에서는 선풍기가 노인의 체온 상승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피부에 물을 묻히면 증발 냉각 효과를 얻으면서 땀으로 빠져나가는 수분을 줄일 수 있다. 약 20℃의 시원한 물에 양손과 팔뚝을 10분간 담그는 것도 심부체온과 심장 부담을 낮추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45℃에 이르는 극심한 건조 폭염에서는 선풍기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의식 혼란이나 비정상적인 고체온 등 열사병이 의심되면 즉각 응급조치와 의료기관 이송에 나서야 한다. 한국은 초고령 사회와 기후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다. 폭염 대책도 이제 '물을 마시고 외출을 삼가라'는 일반적인 권고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