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은희 누구 ...납북·탈출’ 영화 같은 삶

한상희 기자 hsh@ekn.kr 2018.04.17 09: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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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은희의 빈소가 16일 오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9일이며 장지는 안성천주교공원묘지이다. (사진=연합)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최은희는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자, 삶 자체가 한 편의 영화였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납북과 탈출 그리고 수백 편에 이르는 영화 출연과 제작·연출까지. 고인의 인생은 드라마틱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고인은 1926년 11월 경기도 광주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방공연습을 갔다가 배우 문정복(배우 양택조의 어머니)의 소개로 극단 ‘아랑’의 연구생이 된다. 이후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뒤 극단 아랑과 극예술협의회 등에서 연기력을 쌓았다.

고인의 원래 이름은 경순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에서 여류 소설가 박화성 씨의 소설 속 주인공 은희로 개명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영화 ‘새로운 맹서’(1947)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 서구적이고 개성 있는 미모와 연기력으로 단숨에 주목받는 신예로 떠올랐다.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군림했고, 1954년에는 주한미군 위문 공연 차 방한한 할리우드 톱스타 메릴린 먼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했다.

고인은 ‘새로운 맹서’를 찍으면서 촬영감독 김학성 씨를 만나 결혼에까지 이른다. 고인의 나이 18세 때 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길에서 헤어지게 된다.

'성춘향' 여주인공 시절 최은희<YONHAP NO-4737>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61년 신상옥 감독 작품 ‘성춘향’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최은희 씨. (사진=연합)


고인은 1953년 신상옥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라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신 감독과 사랑에 빠진다.

결혼을 한번 했던 여배우와 총각 신상옥의 만남은 당시 세간의 화제였고, 두 사람은 1954년 3월 한 여인숙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치른다.

이후 고인은 신 감독과 함께 ‘꿈’(1955), ‘젊은 그들’(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 등을 찍으며 동지적 관계로 발전한다.

이를 통해 고인은 한국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됐고, 신 감독은 신필름을 설립하며 한국 영화계의 거물로 자리 잡았다.

고인은 이후에 ‘성춘향’(1961), ‘로맨스 빠빠’(1960), ‘상록수’(1960),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연산군’(1962), ‘로맨스 그레이’(1963), ‘벙어리 삼룡’(1964), ‘빨간 마후라’(1964)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특히 영화 ‘성춘향’은 세기의 대결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고인과 신 감독이 ‘성춘향’을 촬영할 때, 홍성기 감독 역시 19세이던 김지미를 주연으로 ‘춘향전’을 찍고 있었다. 당시 언론은 ‘홍 감독의 10대 춘향이와 신 감독의 40대 춘향이의 맞대결’로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두 영화의 대결은 국민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고인은 전성기에 1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갔다. 1967년 안양영화예술학교 설립·교장 겸 이사장을 맡았고, 극단 배우극장을 직접 운영하며 후배 연기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23년간 이어진 고인과 신 감독의 협업은 1976년 이혼으로 끝이 난다.

김정일과 사진찍는 최은희·신상옥 부부<YONHAP NO-4749>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북한 피납 6년째에 상봉한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정일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사진=연합)



이혼한 고인은 자신이 운영하던 안양영화예술학교의 해외 자본 유치차 1978년 1월 홍콩에 갔다가 홍콩 섬 해변에서 북한으로 납치된다. 그리고 8일 뒤인 1978년 1월 22일 오후 3시쯤 김정일의 환영을 받으며 평양 땅을 밟았다.

고인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2007)에서 "김정일은 나에게 온갖 배려와 친절을 베풀었지만, 나는 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썼다.

납북 6년째인 1983년 3월 3년 만에 김정일로부터 연회에 초대받은 고인은 그 자리에서 신 감독을 만나게 된다. 신 감독은 고인이 납북된 그해 7월 사라진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다가 북한으로 끌려갔다. 일각에선 신 감독의 자진 월북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사랑 사랑 내사랑’, ‘철길 따라 천만리’, ‘심청전’, ‘방파제’, ‘불가사리’ 등 17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옛 전성기 때를 재연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후 영화 ‘춘향전’에 쓸 부속품을 구하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갔다가 그곳 성당에서 둘 만의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두 사람은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현지 미국 대사관에 진입, 망명에 성공했다. 부부는 이후 미국에서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부부는 북한에서 김정일을 만날 때 틈틈이 녹음을 해뒀고, 북한에서 가져온 녹음테이프와 사진들로 납치 사실이 인정돼 미국으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았다. 미국 망명 중 두 사람이 서울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89년이었다. 부부는 당시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에서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된 상태로 20일 동안 취조를 받아야 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신 감독은 2006년 4월에 80세를 일기로 먼저 별세했다.

남편을 먼저 떠난 뒤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 대표로 취임해 그해 헤밍웨이 원작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제작과 출연을 맡았다. 2002년에는 뮤지컬 ‘크레이지 포유’를 기획·제작했다. 2006년에는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고인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내게 영화와 같은 삶을 산 여배우라고 말한다. 나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한데 어쩌다 영화 같은 삶을 살게 됐을까. … 나는 분단국의 여배우로서, 신 감독은 분단국의 영화감독으로서 조국의 비극에 희생양이 되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배우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연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며 살면서 모든 이들의 인생이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에너지경제신문 한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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